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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도 너무 더워서 자꾸 잠을 설치게 된다. 요즘엔 정말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너무 힘들다. 특히 토요일엔... 10시 레슨을 맞춰 가는 것이 별로 힘들지 않았는데, 이번 주도 또 지각을 하고 말았다. 거의 30분을 늦게 갔는데, 가보니 같이 레슨 받는 5-6명 중에 1명만 와있었다. 내가 들어가고 나자 연달아 사람들이 들어왔다. 나샘은 "10시까지 오셔도 되요.."라면서 은근히 지각하지 말라는 투의 멘트를 날리신다.

항상 하는 시라디크
A, D현 번갈아가며 하는 두 줄 연습
흐리말리 d minor, 세컨포지션 연습
Bach, Double Concerto 1 악장
집에서 에어콘 켜놓고 하면 악기소리가 좀 나은데, 밖에서 켜보면 악기에선 항상 물먹은 소리가 난다. 그래도 선생님이 현을 바꿨냐고 물으신다. 소리가 좀 달라지긴 한 듯...

별다른 것은 없었고... 바흐는 이제 많이 익숙해지긴 했는데, 속도가 붙으면 음정이 어긋나는 것이 문제인 듯하다. 세컨포지션 음정을 더 정확히 하는 것도 문제. 선생님은 그래도 아주 좋다며 칭찬을 해 주신다. 곧 2악장을 들어갈 수 있겠다고... 완벽하게 곡을 만들고 넘어가는 것이 워낙 힘들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 좀 안타깝긴 하지만.. 그래도 칭찬은 기분이 좋은 일이다.

레슨이 끝나고 나오는데, 장샘이 이번 연주회 정말 할 수 없겠냐고 다시 물으신다. 김샘반 앙상블에 사람이 모자라는데 같이 하면 좋을 것 같다고... 11월10일만 아니어도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겠지만.. 날짜가 겹치는데 어쩌랴.  체력적으로, 시간적으로 어렵겠지만... 내년 봄엔 같이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Posted by 슈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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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연습곡:
슈만, 교향곡 1번 "봄" 1악장
드보르작, 교향곡 8번 1악장
튜닝을 하고, 지휘자님을 조금 기다린 후 연습이 시작되었다. 오늘은 슈만 교향곡 1번 1악장.

이번 가을 연주회 곡은 아니지만, 내년 봄을 기약해서 미리미리 연습을 해두는 곡이라고 한다.

초견으로 새 악보를 보는 것이 부담이 되었다. 처음은 느리게 시작을 해서 박자를 조금 못 맞추긴 했지만 그런대로 따라하고 있었는데, piu vivace가 있는가 하더니... 엄청 빨라져 버렸다. 16분음표들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흑흑.. 집에 가서 천천히 연습해야할 듯...

요즘은 빠른 곡들에 대한 부담감이 장난이 아니다. 빠른 곡을 보면 마치 시험공부 안하고 시험장에 와 앉아 있는 것 같은 패닉상태에 돌입한다. 음정도 불안해지고, 보잉은 더 뻣뻣해지고... 천천히 하면 또박또박 음정을 듣고 보잉도 신경을 쓰는데 말이다...

결론은 사실 잘 알고 있다. 천천히 연습하면서 점점 속도를 붙여 나갈것. 스케일과 에뛰드 연습을 철저히 할 것. 문제는 그렇게 연습을 할 시간이 항상 부족하다는 것이다.

나머지 30분간은 드보르작 8번 1악장을 다시 연습했다. 여전히 잘 안된다. 흑흑... 연주회 곡을 연습하는 것보다는 집에서 차근히 지금 레슨 받는 곡을 연습하는 것이 맞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오케스트라 연습에 가면... 역시 집에서 연습을 할 껄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둘 다 연습을 할 시간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맘처럼 안되니...쯧.... 아직 오케스트라를 할 만한 실력이 아닌데 괜히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계속 들긴 하지만, 너무나 하고 싶었었는데, 계속 미룰 수도 없다는 생각도 들고...

어제 오케 연습하면서 망가진 자세를 다시 다듬고, 오늘은 다시 기본연습에 돌입해야 겠다. 빠른 보잉 연습도 좀 해보고....
Posted by 슈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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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도 작고, 팔도 짧고, 손가락도 짧아서, 4/4 악기를 쓰면서도 늘 불만이 가득했었다. 악기만 조금 더 작으면 정말 연주가 너무나 잘 될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고나 할까. 그날 그날 연습이 안되면, 악기가 너무 커서 그렇다는 둥, 바디가 36센티나 되는 거대 악기라는 둥.. 온갖 핑계를 악기의 크기에 갖다 붙이곤 했다.

레슨 선생님도 손이 작다는 둥, 악기가 크다는 둥의 말을 가끔씩 하셨는데, 그게 학생의 실력을 탓해서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것 보다는 나아서 그러시는 것이라고 짐작은 하면서도.. 7/8을 가져보고자 하는 내 열망에 부채질을 하는 격이 되었었다.

4/4인 빅토르 오디놋을 처분하고... 잠시 3/4을 사용해봤었는데, 3/4은 정말 연주가 편하긴 했지만, 너무 심하게 작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래도 3/4는 아닌 것 같고, 4/4 중에서도 넥이 얇게 빠져 있거나, 길이가 좀 짧은 악기를 구하거나, 정말 7/8을 구해야 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던 중.... 이 악기를 발견했다.

모양도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고, 판매자가 올려 놓은 사운드 샘플도 그럭저럭 맘에 들었다. 가장 맘에 든 것은 가격...ㅡㅡ;; 한국에 가져와서의 수리비까지 고려해도 많이 저렴했다. 그리하여.. 이 악기는 나에게로 오게 되었고, 수리하지 않고 대충 써보려고 했으나, 가져온 지 하룻만에 지판 분리라는 황당한 일이 발생하여, 지판을 올리고 브릿지를 교환하는 수리를 거치게 되었고, 수리 후에는 상당히 놀랄만하게 음질이 개선되었다.

악기가 온 것이 4월 초이니 벌써 꽤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사용 후의 총평은 매우 만족. 일단 악기가 손에 맞으니, 음정 잡는 것이 훨씬 부드럽다. 특히나 겹음을 연주할 때 훨씬 좋은 것은 사실. 악기의 소리 크기는 사실 비교를 할 수가 없다. 4/4라고 해도 워낙 차이가 있으니까.

이 악기는 세팅을 제대로 하고 나니 소리는 더 좋아 졌고 커졌는데, 아직도 브릿지나, 사운드포스트를 워낙 좋지 않은 걸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개선의 여지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악기 사이즈가 작은 것에 비해서는 소리가 시원시원하고 울림이 좋다. resonance가 좋다는 것은 나같은 초보에게는 참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운지를 했을 때 제대로 운지가 되었는지 파악하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7/8을 써보고 나니, 사이즈가 작다고 해서 특히 소리가 작거나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악기가 음량에서 차이가 난다고 하더라도, 손가락이 짧아서 연주가 힘들다고 불평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7/8을 적극 권하고 싶다.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이나 세종문화회관에서 리사이틀을 할 것이 아니라면, 사실 악기의 음량은 아마추어에게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을 것인데, 굳이 연주하기 어려운 악기를 붙들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내가 살면서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다고....

문제는, 7/8에 익숙해진 손가락으로는 연주해 볼 수 있는 악기의 숫자가 줄어들 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나중에 더 좋은 악기들을 만나게 되면, 분명히 대부분은 4/4일테니, 7/8로 연습을 해온 나로서는 연주가 힘들 수도 있을 듯하다. 글쎄... 그건 내가 좀 더 악기를 잘하게 되면 또 극복가능한 문제가 아닐까? 같은 4/4라도 차이가 많이 나곤 하니까...

나중에 좋은 사진기를 구하게 되면 악기 사진을 올려봐야 겠다.
Posted by 슈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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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피가로의 결혼과 발트뷔네 콘서트 DVD를 연이어 봤더니... 새벽 3시가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조금만 더 자야지... 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9시 40분...;; 너무 졸립고 몸도 안좋은데 그냥 제낄까.. 하다가... 결국 출발.

늘 하는 시라디크 연습곡, A, D현으로 하는 연습.
흐리말리 d minor scale, B flat major 2포지션 scale.
Bach, concerto in d 1043, 1st mov.
시라디크는 책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달랑 한 페이지만 복사해주시고, 모든 레벨을 동일하게, 한 2년간 같은 것만 하는 것으로 봐서, 보잉을 위한 연습이라고는 생각하는데... 가끔은 다른 에뛰드도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취미로 하는 단체레슨생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으면서도 효과적인 연습을 고민한 결과인 듯..

문제는 같은 연습을 2년째 하고 있는데도, 난 여전히 활이 비뚤고 내림활-올림활의 힘균형이 균일하지 않으며, 때로 음정도 흔들린다. ㅡㅡ;;

흐리말리는 바흐 더블 콘첼토를 위한 연습. 오늘은 컨디션이 영 아니어서인지.. 포지션이동에 삑사리가 많았다. 흐리말리 뿐아니라, 바흐를 할 때에도 포지션 이동할 때 마다 괴로울 지경. 2포지션 음정도 오늘은 잘 안되고... ;;;

바흐 연습을 좀 더 해야 겠다. 다음 주에 1악장을 끝내고 2악장을 들어갈 듯. 언뜻 본 2악장은 포지션 손가락 번호가 예술이더라...;;; 쉬운 스즈키 번호를 놔두고 왜 갈라미안판으로..ㅠㅠ

연주할 때 마다 가속도가 붙어서 조절 불가능한 속도가 되곤 하는 것도 문제. 박자를 잡아야 연주도 여유가 생기고 음정도 정확해 질 것 같다...
Posted by 슈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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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질서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괴짜 (Freaks of disordered thought)

(Published in
The Strad, October 2003)

헨리의 사전은 훌륭한 바이올린 제작자들에 대한 찬사로 가득차 있지만, 형편없는 제작자가 나타나면 그는 점잖게 표현하지는 않는다. Alan Coggins가 그의 뛰어난 작품에 대해 이야기한다.

**Henley의 Universal Dictionary of Violin and Bow makers에 대한 글입니다.
**헨리의 책에서 인용된 부분은 이탤릭체를 사용하지 않고, 배경색과 글자색을 다르게 처리하였습니다. (예시)


"헨리"라는 말을 현악기와 관련된 세계에 살고 있는 어느 누구에 언급한다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성공한 영국의 바이올리니스트, 교수, 그리고 작곡가의 이미지는 아닐 것이다. 대신에 사람들은, 'Universal Dictionary of Violin and Bow Makers' 라고 옆에 쓰여져 있는, 두껍고, 무거운 책을 불가피하게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 책은 전세계의 바이올린 제작자들, 딜러들 그리고 수집가들의 서재에서 가장 흔하게 발견되어 지는 책이고, 약 9,000명의 제작자들의 정보가 들어 있는 표준화된 참고서가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은 단지 "헨리"라고 언급되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윌리엄 헨리는 사실 12살의 나이에 연주여행을 시작했던 재능있는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그는 신동 파가니니 (The Wonder Boy Paganini)라고 불려졌는데, 이는 단지 바이올린에 대한 그의 재능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정확히 파가니니가 태어난 날로부터 100년뒤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그는 런던에서 오귀스트 빌헬미와 같이 공부했고, 그 둘은 매우 절친한 사이가 되었으며 때때로 빌헬미의 집에서 함께 연주하곤 했다.

헨리는 성공적인 연주경력을 가졌었고, 결국은 런던의 로얄 아카데미에서 작곡교수이자 바이올린과 주임교수로 임명되었다. 그의 다양한 연주, 작곡, 교수생활 이외에도, 그는 또다른 분야에 위대한 노력을 기울였었다 - 즉, 바이올린과 활 제작자들의 총괄 목록의 작성이라는 분야이다. 헨리는 개인적으로 가능한 한 많은 악기들을 검사하고 시연해 보았으며, 성공적인 음악가로서, 그의 의견은 아주 권위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성격의 정보를 모으는 것은 확실히 분명한 종착점은 없는 것이다. 헨리는 그의 작품을 마무리지어 출판할 수 있기 전인, 1957년에 사망했고, 이 사전은  작가의 노트로부터 딜러인 시릴 우드콕에 의하여 만들어 졌다. 이 책은 약 3년 뒤 1959-60년에 최종적으로 출판되어 졌고 최초에는 5권으로 되어 있다가, 1973년에 우리에게 친숙한 1권짜리로 재 출간되었다.

이 사후 출판이라는 상황은 이 책의 가장 명백한 결점들 중 하나로 귀결되어졌다. 우드콕은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책이 포함시키고 싶었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중 많은 것들이 헨리에 의하여 악기 자체와 악기의 음질에 대한 헨리 자신의 직접적인 평가에 근거를 두어 쓰여진 것인 반면에, 헨리가 아마 연주는 커녕 결코 본 적도 없었을 악기들에 대한 언급도 이 책에는 존재한다.

이들 기록들은 모두 너무나 명백하게 그 제작자들 자신들에 의하여 쓰여진 것들이며, 그리하여 문제의 소지가 있다. 바이올린 제작자들에가 그들 자신의 작품을 평가해 달라고 주문하는 것은, 마치 정치가에게 그들이 의회에서 유용하고 효율적인 구성원인지를 묻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 거의 확실하게, 우리는 매우 장황하고 열렬한 답변을 얻게 될 것이다. F.E. Davenport에 대한 기록을 부분적으로 보면:

뉴욕에서 작업, 1908-1914... 전문적인 제작자는 아니지만, 그때까지감정가들이 가장 흥미로운 이탈리안 모델들이라고 하는 몇몇 악기를 제작하였다. 우수한 제작 솜씨는 크레모나의 중요한 제작의 선구자들의 것과 거의 맞먹는 것으로 평가되어진다. 놀라운 - 절대적으로 새롭지는 않으나 건강하고 강한 톤 - 후세에 의하여 격찬되어질 일종의 투명함을 관철시키는 음질 이라는 결과를 달성하였다

헨리가 미국에서 일하는 이 아마추어 바이올린 제작자에 관하여 이런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고 정말로 믿겨지는가? 우드콕은 이런 과장된 기록 (출처도 없이)을 삽입하였을 뿐아니라, 또한 합리적인 길이로 그러한 기록들을 편집하려고 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우리는 A.H.Merrill에 대한 기록이 한 페이지 전체를 차지하게 되는 것도 발견하게 되며 (이는 그란치노나 로제리에 대한 기록의 길이보다도 긴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렇게 시작한다:

일리노이의 엘긴에서 1853년 출생. 프랑스-영국계. 1872년까지 19년 동안 보통 사람들이 성장하면서 겪는 우여곡절을 겪음. 바이올린 음악에 매혹되어 그는 Hopf - "성숙되기 전에 수확한" 괴물같은 소리가 나는 -를 한대 구입. 주로  "활기를 주고 취하게 하는 음료"를 자주 마시라는 것이 주요한 가르침이었던 것 같은 선생으로 부터 6번의 레슨을 받음.

- 그리고 기타등등. 이런 기록을 읽어 나가면서, 우리는 결국 많은 그의 악기들이 때때로 터무니 없이 가격이 매겨진 크레모나 악기에 대항하여 왔고, 가장 성공적인 방식으로 시련을 극복하여나갔다 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주장에 다소간 감명을 받을지도 모른다, ... 1924년까지 10,000개의 악기를 수리하는 놀라운 기록을 가지게 된다.

다행히도 이러한 자기평가는, 불가피하게 공통의 주제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꽤 쉽게 알 수가 있다. 그 제작가들은 위대한 크레모나의 마스터들과 유사한 (때로는 능가하는)음질을 가진 악기들을 제작하였거나, 또는 그들은 '잃어버린 크레모나 바니쉬'를 재발견했다 - 사실, 많은 제작자들이 둘 다 이루어 냈다고도 쓰여져 있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러한 주장들은 별로 새로운 것은 아니다. 바바리아의 Zacharias Fischer는 분명히

... 그의 주장에 따르면, 스트라디바리와 슈타이너와 동등한 품질로 제작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했다. 이러한 과정은 가끔 해로운 화학물질을 넣어 목재를 오븐에 가열하여 시도되어 졌으나 무익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1786년이었는데, 스트라디바리의 사후 겨우 50년이 지났을 때였다. 스스로 평가된 기록들은 의도된 대로의 효과를 항상 거둔 것은 아니었다. 뉴질랜드의 George Nicoll 은 독자들을
완전히 혼동시키는데에 성공했을 뿐이다. 그는 그가 다음과 같다고 믿었는데:

...과학적인 바이올린 제작의 표준적인 작업이 결과적으로 계획되어 질 수 있는 핵심을 제공했다. 길이와 넓이의 2차원만을 다루면서, 유클리드의 조화론을 공부하였고 길이에는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깊이에 대하여 너무나 많은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현대의 수학자들은 '생명' - 즉, 진동과 더불어 있는 문제' - 의 근원으로부터 너무나 벗어나게 되었었다. 그의 바이올린을 이 극과 극의 상대성원리에 맞게 디자인했고, '순수한 이탈리아의 음색'의 생산으로 귀결되어 졌다.

일단 의심스러운 기록들을 인식하는 법을 배운 후에는, 헨리 자신에 의하여 쓰여진 기록들을 읽음으로서 이 사전을 진정으로 즐길 수 있다. 그의 저술은 교양있는 평가, 유머 그리고, 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에 있어서는, 가차없는 비판의 매력적인 결합을 보여준다. 그는 특히 간결하게 문장을 잘라내는 데에 재능을 보여주었고, 가치없는 대상에 대하여 너무 많은 단어들을 낭비하지 않으면서 분명한 생각을 전달할 수 있었다. 예를들어, 그는 우리에게 요셉 슈타이너 (Joseph Steiner)  (1)가 '미텐발트에서 1792년에 일을 했고. 절대적인 평이함으로 악명을 얻었고. 형태를 망가뜨리고 음질에서 가치가 없었다'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리고 한술 더 떠서 덧붙이기를: 때때로 "미텐발트 ("Mittenbald")"라고 레이블에 적었던 무식한 사람. 헨리는 값싸고, 대량 생산되는 악기들에 대해 쓸 시간이 없었으며, 그의 이러한 악기들에 대한 기술은 특히 매서웠다. Heureux의 레이블이 붙어서 판매되는 바이올린에 대한 그의 평가를 보자: 

"기분좋은 (pleasing)" 또는 "좋은 인상을 주는 (prepossessing)"의 뜻을 가지는 그 이름은 매우 부적절하며, 판매자의 뻔뻔함이 제작자의 형편없는 재능 만큼이나 크다. 생동감이라고는 없는 나무로 된 가면; 현저히 관상학적으로 빈곤한 모습. 가늘고 작은 음색은 좋은 활로 연주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하다.

그리고 때때로 그의 기록은 너무나 가혹하여, 우리는 그가 그 제작자에 대하여 개인적인 혐오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의심하게 되기도 한다. 그의 William Beale의 작품에 대한 의견은 상당히 악의적이다:

정신없고 무질서한 생각을 가진 괴짜. 아웃라인, 스크롤, 사운드홀은 혐오스럽도록 못생기게 만들어 졌다. 목재는 평범하고, 바니쉬는 재앙이며, 소름끼치게 공허함 음색을 가졌다.

 

제작자에 의하여 쓰여지지 않은 것이 분명한 기록이다. 가끔 헨리는 그의 경계심을 약간 풀고는 조금 더 급진적인 의견을 그의 기록에 슬며시 집어넣기도 한다. Adam Friedrich Grimm 에 대하여 그는 수 년동안 많은 바이올린 수리사들의 머리 속을 스쳐갔을 생각을 표현한다:

장인의 솜씨는 매우 비참한 지경이다. 때로 퍼플링이 없다. 1기니 정도의 가치밖에는 없는 메마른 음색. 망치의 쿵하는 소리는, 이러한 어리석음을 부수기 위하여 사용된다면 (우리 중 몇몇에게는) 비음악적으로 들리지 않을 것이다.

M.E. Lantez의 경우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의 인내심과 유머가 그를 완전히 떠나서 상당히 무뚝뚝해 보이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는 아주 드문 경우일 뿐이다:

그의 악기들 중 다수는 예민한 연주자들이 소화불량에 걸리게 할지도 모르는 음색을 가지고 있다. 싸구려 작업은 바보 멍청이들이나 고마워 할 것이다.

많은 헨리의 기록들은 혁신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읽을 거리를 제공한다. 그는 악기의 디자인이나 형태라는 측면에서 실험적인 '개선'의 수많은 예를 묘사하고 있으며, 이런 예들을 전통주의자들의 완벽한 경멸을 가지고 대한다. 사실, 영원히 사랑받는 악기들의 한정된 숫자라는 점을 보면, 그의 이러한 의견은 옳은 것이었다. 그의 평가는 차분한 정중함 - Regina Geigenbau에 대한 평가 (아래 참조)와 같은 - 으로부터 완벽한 경멸 - 아래 기록에서 보듯이 영원히 저주받은채로 남은 John J. Hawkins의 경우 - 까지 다양하다.

Regina Geigenbau:

어퍼와 로우어 립이 음색을 제어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다. 앞판과 뒷판은 너무 아칭이 져서 옆판에서는 결합되어 있을 정도이고, 허리의 립은 보통의 바이올린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이 남아있다. 소리의 방출은 보통방식으로 제작된 악기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이상한 윤곽의 바이올린들은 사실 진지한 연주자들이 고려할만한 가치는 없다...



John J. Hawkins:

1800년 런던에서 바이올린의 새로운 형태로 특허를 받음. 옆판이나 뒷판이 없고 단지 강한 립이 앞판 아래로 이어져 있는데, 그 위에는 사운드포스트가 스프링에 의하여 앞판을 누르며 세워져 있다. 단순한 음량의 크기는 이 광기어린 구조에 의해서 망가지지는 않았으나, 아름다운 울림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그의 완전히 어리석은 혁신을 적용하기 위하여 진짜 스트라디바리우스를 파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실험가들 중 적어도 하나는 올바른 궤도에 잘 올라서 있었던 것 같다. John Frederick Grosjean은 돌아보면, 광물매장층에서 초기의 시굴을 시도했던 것과 같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다:

'바이올린을 만들지는 않았으나 현악기의 음질을 개선하고자 했던 수많은 기인들 중의 하나였다. 1837년에 바이올린의 표면을 아교와 유리가루로 코팅을 하는 아이디어로 특허를 받았다. 이 터무니없는 혁신은 이어지는 악평들로 인하여 그에 알맞는 영역으로 가게 되었다 - 그것은 망각의 영역이다.'


이런 종류의 정보를 모으고 기록하는 것은 매우 지루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몇몇 작은 일화들이 연구자의 마음을 밝혀주기도 하는데, 헨리는 이런 좋은 이야기들이 바이올린제작자들의 작업에 꼭 관계가 없을지라도 가능한 곳에서는 포함시키기도 하며 즐겼다. 그리하여, 우리는 별났던 Joseph Merlin에 대한 훌륭한 묘사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1770-1783년 런던에서 작업. 소호광장에 있는 코널리부인의 칼리슬 저텩에서의 가면무도회에서 바퀴달린 스케이트를 타고 스스로 제작한 바이올린을 연주하다가, 500파운드 짜리의 거울앞으로 돌진하여 거울을 산산조각으로 부수고 그의 악기를 조각조각나게하였고, 스스로도 엄청난 부상을 입어 그 명성을 획득.


그리고 Thomas Calow의 비극적인 이야기:

참을성이 없는 경향을 가진 무책임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가 하기로 하면 훌륭한 수리작업을 해내곤 했다. 1905년, 겨우 37세의 나이에 더블베이스 현에 목을 매어 자살.


물론 바이올린 제작자에 관한 어떤 책도 '초자연적인 계시'의 이야기 없이는 완전할 수는 없을 것인데, 그것은 Heinrich Ohlhaver에 의하여 제작된 Revalo 바이올린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이다. Heinrich Ohlhaver는:

..."영적인 집회에서, 스트라디바리의 유령이 그에게 나타났고 그의 비밀을 알려 주었고, 거기에서부터, 그 비결의 현대 바이올린으로의 이전은 "콜럼버스의 달걀만큼이나 쉬운" 것이 었다."고 말했다..



또는, 초자연적이면서 실험적인 접근법을 결합시키려고 했던, 석탄 광부였던, Ralph E. Fishburn도 예가 될 것이다:

외관상 성실한 열렬한 심령술사로서, 그는 靈媒의 인도를 받아 스트라디바리의 두 대의 바이올린의 환영을 하나의 악기로 만들었다. 그는 이전에 제작에 대한 지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 3개월만에 악기를 한 대 제작할 수 있었고, 이를 '비올라-바이올린'이라고 명명했다.아웃라인은 분별있는 실물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확실히 꿈속에서 본 환영이었다.


이 책에서의 수 많은 비판적이고 불손한 기록의 즐거운 예시들에도 불구하고, 헨리가 제작자의 작업을 훌륭한 것으로 여겼을 때의 그의 의도는 확실할 것이다. 그의 시적인 서술방법은 다시 나타나지만, 간결함의 한계는 더이상 필수적이지 않으며 그의 생각을 더욱 더 펼쳐나간다. Giovanni Francesco Pressenda의 경우가 그러할 것이다:

그의 예술에 관해 광대한 사고의 폭을 지닌 심오한 제작자로, 크레모나와 프랑스 학파의 예술적 기교를 완전히 흡수하였고 그의 바이올린에 다양한 특성을 스며들게하고, 형상화시키고, 완벽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는 최상의 질서로 특징지어지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었고, 단순한 탁상공론은 삼가했으며, 그 자신을 전적으로 이전의 제작자들의 법칙에 제한시킴으로서 창조를 하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느꼈다.


그는 한페이지가 넘도록 이런 식으로 계속 서술하고, 어느 시점에서는,

우리가 Pressenda의 악기들이 후대에게 이탈리아의 바이올린으로 여겨질 것이라고 주장할 때에 이것이 과장된 허풍으로 비난받지 않기를 희망한다,

 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더 활발한 많은 의견이 이 책에 포함되었다는 점은, 우드콕이 헨리의 서술을 그의 사후에 출판하여 얻은 가장 다행스러운 점이라고 할 것이다. 만약 헨리가 살아서 이 사전의 마지막 초안을 검토했다면, 얼마나 많은 이런 기록들이 수정되고 편집되어 없어졌을지 우리는 단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기록들의 존재는 책에 생명과 흥미를 넣어 주기 때문에,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이 책에서 전화번호부를 대할 때에 기대하는 정도의 흥분을 기대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Universal Dictionary of Violin and Bow Makers는 감동할 만한 성과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바이올린 제작자들에 대해 이것과 같은 책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늘날이 소송이 많은 사회라는 점을 고려하다면, 앞으로도 이런 책은 없을 것이다.

The Universal Dictionary of Violin and Bow Makers는: Amati Publishing Ltd, 1 Northfields, Speldhurst, Tunbridge Wells, Kent TN3 OPL, UK Tel: +44 1892 870319 에서 구할 수 있다.

Alan Coggins는 호주 시드니 부근의 블루마운틴에서 Adele Beardsmore와 같이 일하는 바이올린 제작자이자 수리전문가이다. 그는 바이올린의 여러가지 측면에 대하여 저술을 해왔고 The Strad지에 정기적으로 기고한다. 그의 글들은 그의 홈페이지에서 읽어볼 수 있다. 앨런은 또한 호주의 현악기 제작자들에 대한 책을 쓰고 있으며, 온라인에서 과거의 현재의 500명 가량의 호주 제작자들의 정보를 담고 있는 Directory of Australian Violin and Bow Makers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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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친기에 올렸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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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부도 좋았지만... (피아노와 안맞는 부분도 있었지만...ㅡㅡ)
후반부는 마치 팝아티스트의 공연 같았습니다. 프로그램이 거의 바이올린 명곡집 수준이었....
 
친구인 마이어의 바이올린 소나타 3, 4악장에서, 라벨의 치간느,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 폰세의 에스텔리타, 차이콥스키의 멜로디, 사라사테의 서주와 타란텔라.... 로 이어지더군요.
 
정말 파워풀한 소리를 내는 벨... 1713년 스트라드의 소리에 벨의 힘있는 보잉이 결합되어서 나는 소리인가요... 4열에서 듣긴 했지만, 아무리 앞쪽에 앉았었다고 하더라도, 예당 연주회에서 그렇게 귀가 멍멍할 정도로 소리가 크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 후반부 중반에 I love you, Jo라고 소릴 지르는 황당한 일이 있었는데.. 전 사실 I love your strad....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당...ㅡㅡ;;;

매우 미국적인 연주, 정말 재미있는 공연이더군요^^ 벨의 사진 몇장 첨부합니당. 두번째 사진의 연주 모습이 아주 전형적인 그의 연주모습이더군요^^

Photo by Buck Ennis
Joshua Bell
photo by Chris Lee
Posted by 슈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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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dge fund plays on theme of violins

헷지펀드가 바이올린을 주제로 연주하다 (중의적인 표현으로, 헷지펀드가 바이올린들을 (투자의) 주제로 삼다.. 라는 의미도 있겠네요.)


올드 바이올린에 투자하는 헷지펀드의 금액이 천백만불 (약 110-120억원)이 되었는데, 전에는 수집가들이나 애호가들의 독점적인 영역이었던 특이한 자산들에 최근에는 투자자들도 돈을 투자할 용의가 있음을 보여준다. 런던의 바이올린 딜러이자 수리가인 플로리안 레온하드는 "Fine VIolins Fund"가 5천만불 (약 5백억원)을 모아 8%-12%의 목표 수익률을 가지게 되면 그 펀드에 투자를 할 생각이다. 그 펀드는 아마 주식과 채권 이외의 자산에 투자하려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자산들의 종류들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것일 것이다.


이전에는 금융시장과는 별 관련이 없었던 자산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와인, 미술품, 운송, 그리고 심지어는 축구선수들에게까지도 투자하는 헷지펀드들이 만들어졌다.


"재무적으로, 이것은 엄청나게 안전한 장기 투자입니다"라고 레온하드씨는 말한다. "이것은 투자자로서 당신의 포트폴리오를 다각화 시켜 주는데 도움이 됩니다."


펀드는 또한 박애주의적인 목적도 가지게 되는데, 펀드가 사게되는 바이올린들은 유망한 음악가들에게 대여되어 그들의 가치에 기여를 하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와인보다 훨씬 낫지요. 와인은 사라져 버릴 수 있어요. 또 미술품과는 달리 바이올린은 유행도 타지 않지요."라고 그는 말했다.


바이올린들은 미술품들과 마찬가지로, 주로 큰 은행들이나 부유한 수집가들이 취미나 투자품으로 여기며 구입해왔었다. 1992년에 FoxPro라는 소프트웨어를 마이크로소프트사에  팔았었던, 데이비드 풀턴의 스트라디바리와 과르네리 수집품들은 최고의 수집품들 중 하나이다.


투자자들은 지난 반세기동안 보여졌던 악기값의 폭등이 앞으로도 계속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서, 최근에 각각의 악기들 - 가장 귀한 것은 수백만불 (수십억원)에 달한다 - 을 사서 재능있는 음악가들에게 대여하려는 목적으로 같이 모이게 되었다.


그러나, 몇몇 투자자들은 시장성이 부족하고, 무엇이 앞으로 가격을 오르게 할 요인이 될지 예상하기 어려운 자산에 돈을 넣어 놓는 위험성에 대하여 우려하고 있다. 작년에 런던의 우표딜러인 스탠리 기본스가 우표에 투자하려는 헷지펀드를 시작하려고 했던 계획이 무산된 것을 보면 그런 우려는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한 때 애매한 자산들이 주류가 되기 시작하기도 한다. 재보험, 대출, 카본 크레딧 (배기가스 배출 허용한도), 그리고 영화산업투자 등이 주목받기 시작한 자산들이다.


몇개의 전통적인 헷지펀드들은 또한 더욱 특이한 자산들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와인투자펀드의 이사인 피터 런쩌는 한 헷지펀드가 벌서 그의 와인펀드에 백만 파운드 (약 2십억원)를 투자했다고 말했다.


Hedge fund plays on theme of violins

By James Mackintosh

 

Published: May 23 2007 23:23 | Last updated: May 23 2007 23:23

 

A hedge fund investing in old violins has been pledged $11m (£5.5m) in the latest sign of investor willingness to put money into offbeat assets that were previously the exclusive domain of collectors and enthusiasts.

 

Florian Leonhard, a London-based violin dealer and restorer, is aiming to start investing the Fine Violins Fund once it has raised $50m, with a target of returning 8 per cent to 12 per cent a year.


The fund is perhaps the strangest in a series of new asset classes being created by investors trying to avoid stocks and bonds.

 

Hedge funds have been set up specialising in wine, art, shipping and even football players, demonstrating the appeal of assets that historically have not been correlated with financial markets.

 

Financially it is a dead secure long-term investment,” Mr Leonhard said. “It helps to be versatile in your portfolio as an investor.”

 

The fund will also have a philanthropic aim as the violins it buys will be lent to up-and-coming musicians, contributing to their value.

 

It is much better than wine,” he said. “Wine can go off. And unlike art, violins are not subject to fashion.”

 

Violins have long been bought alongside art by big banks and wealthy collectors as both hobby and investment. The Stradivari and Guarneri collection of David Fulton, who sold his FoxPro software to Microsoft in 1992, is among the world’s best.

 

More recently, investors have clubbed together to buy individual instruments – the rarest of which can cost several million dollars – to lend to talented musicians, in the hope that the big price rises seen over the past half-century will continue.


But some investors worry about the dangers of putting money into assets that are hard to sell and where there is difficulty in establishing what drives prices. Such reservations helped scupper plans last year by Stanley Gibbons, the London stamp dealer, to launch a hedge fund investing in stamps.

 

However, once obscure assets are becoming mainstream, with reinsurance, direct loans, carbon credits and film financing being given attention.

 

Several traditional hedge funds are also beginning to look at more exotic assets. Peter Lunzer, director of the Wine Investment Fund, said one hedge fund had already invested £1m via his fund.

 

Copyright The Financial Times Limited 2007

Posted by 슈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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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웰백님이 올리신 Fulton씨(http://cafe.naver.com/violin79/17000). 그 분의 악기 목록을 Cozio.com에서 뽑아봤습니다. sheilascorner에 있는 악기들 보다 몇개 더 많더라구요^^ 첼로에 비올라... Fulton이라는 이름은 가끔 cozio에서 악기 검색하면 나와서 누군지 상당한 재력가로군.. 하고 생각했었었죠...  


http://www.cozio.com/Owner.aspx?id=152에 가셔서 ID를 클릭하시면 각각의 악기의 설명도 보실 수 있습니다^^

ID
Maker Type Year Name Owned From Owned In Owned Till
2324 Guarneri, Pietro (of Mantua) violin 1698 ex-Shapiro 1981 2002  
212 Stradivari, Antonio violin 1709 La Pucelle; Virgin, Maiden   2002  
1291 Stradivari, Antonio violin 1713 Baron d'Assignies 1997    
254 Stradivari, Antonio violin 1714 Sinsheimer; General Kyd, Perlman 1994 2005  
667 Stradivari, Antonio violin 1715 Marsick   2002  
1471 Stradivari, Antonio violin 1715 Baron Knoop; ex-Bevan 1992    
411 Guarneri del Gesù, Giuseppe violin 1734 Haddock 1993 1998  
417 Guarneri del Gesù, Giuseppe violin 1735 d'Egville 1998    
213 Guarneri del Gesù, Giuseppe violin 1737 King Joseph   2002  
214 Guarneri del Gesù, Giuseppe violin 1737 Stern; ex-Panette, ex-Balatre, ex-Alard 1994   2005
3016 Bergonzi, Carlo violin 1740c ex-Kreisler   2004  
256 Guarneri del Gesù, Giuseppe violin 1742 Lord Wilton 1999    
447 Guarneri del Gesù, Giuseppe violin 1743 Carrodus   2003  
793 Guarneri, Andrea viola 1676 Conte Vitale   2002  
278 Stradivari, Antonio cello 1713 Bass of Spain; Adam 1999    
2864 Montagnana, Domenico cello 1737 ex-George Gudgeon   2004  
1626 Guarneri, Pietro (of Venice) cello 1739c ex-Beatrice Harrison   2004  

요 아래 링크는 Fulton씨에 대한 약간의 백그라운드가 나와있는 셰일라스 코너 웹페이지입니다. 페이지 아래쪽에 풀턴씨에 대한 기사가 몇개 링크되어 있는데 재밌는 내용이 많습니다.... (단.. 영어라는것ㅡㅡ;;)..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가 어떻게 악기병 환자 (악기 중독자...)가 되어 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떻게해서 처음에 집 값보다 더 비싼 Pietro Guarneri of Mantua를 사게되고.. 스트라드와 델제수들을 사들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있구요.. 그래도 이 아저씨가 악기 사들이던 때는 악기값이 그나마.. 지금보다는 저렴한 편이었던 것 같더군요...


바이올린의 투자가치에 대한 이야기 끝에 풀턴은 악기를 모으는 것이 "투자"가 아니라 "순수한 소비"라고 하더군요.. 자신은 악기를 모으기만 할 뿐, 팔지 않기 때문에...ㅡㅡ;;


그는, 자신을 수백년을 살고 있는 이 악기들의 단지 본인의 인생만큼 (몇십년간)의 보관자일뿐이라고 생각한답니다. 그래서 악기를 들고 비행기를 탈 일이 있었을때, 비행기가 떨어져서 악기가 파괴되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했는데.. 사고가 나면 본인도 죽을 것이라는 생각은 한참 뒤에나 들더랍니다.. 진정한 악기애호가에요...^^


http://www.sheilascorner.com/collectordave.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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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초보자들이 활 힘조절을 못해서 덜덜 떨면서 활긋기를 하는 것을... 활비브라토라고 부르는 것이.... 바친기 공식용어로 굳어진 듯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정말 "활비브라토"라는 것이 있습니다..^^


Matthew Loucks라는 분의 올 11월 헨델의 메시아 공연 프로그램노트에서 다음 내용을 발췌했습니당..

http://www.earlymusiccolorado.org/emc_article.html


Several Baroque bowing techniques have also been incorporated into tonight’s performance which on the outset might appear unorthodox or awkward to many performers (and listeners) but nevertheless are essential to the process of recreating a more “authentic” Baroque sound.   

 

One example is the technique referred to as “bow-vibrato” which is described in both Leopold Mozart’s and Quantz’s Treatises.  Bow-vibrato was performed by drawing the bow across the string(s) while gently applying pressure with the index finger at varying rhythmic intervals creating a distinct “pulsating” or “tremelo” effect.  Many string players today mistakenly interpret “bow-vibrato” as “portato” which is entirely different but is notated in a similar fashion.  Händel calls for “bow-vibrato” in movement #2 (Comfort Ye…) as well as movement #36 (I know that my Redeemer liveth ..).


이야기인즉슨... 메시아 두군데에 헨델이 활비브라토를 하라는 지시를 해놓았다는 것인데요... 이 활비브라토는 예전 바로크시대 활테크닉 중의 하나로... 활을 현에 그으면서, 여러가지 리듬간격으로 검지로 활을 눌러주면 진동하거나, 트레몰로 같은 효과를 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요즘 연주자들은 활비브라토를 포르타토와 같은 것으로 해석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활비브라토라는 것이..... 초보자들의 경우처럼 무의식중에 덜덜 떨리는 것은 아니지만, 검지로 의식적으로 활을 눌러 결국... 음을 떨리게 하는 효과를 내는 것이니... 어쨌든, 활로 떨리는 소리를 내는 것은 맞기는 맞습니다..ㅡㅡ;;




그리고 하나 더.. 개방현에서 비브라토를 하는 법!

물론 위에서 말씀드린 활 비브라토 (초보용이건 바로크용이건 간에..^^) 하시면 되겠지만, 정석 (과연 정석인지는... 미확인..)은 이렇다는 군요.


http://www.violintips.com/info/vibrato.html

Believe it or not, there is a way to get a vibrato 'effect' on an open (unstopped) string. This is usually only used for the open G string, because it is the only note on the violin that there is no alternate 'fingering' for. (That would be the open C string on viola).

The way you do this is to stop the note one octave above the open string with your finger, on the next highest string (ex. G, 3rd finger on the D string), and apply vibrato to that note, while playing only the open string below. This creates a shimmering vibrato sound for the open string.

This happens because the vibration of the open string creates a sympathetic vibration in the string next to it (especially when it is one octave higher). And because you are applying vibrato to that higher octave, it passes the effect back to the open string in a similar way, through sympathetic vibrations. It also affects the overtones of the open string.


http://www.philharmonia.co.uk/thesoundexchange/the_orchestra/strings/cello/vibrato/ (첼로에 관한 내용이지만, 유사한 내용이 맨 끝에 있지요)


즉.... 바이올린의 경우, 가장 낮은 G음을 개방현으로 연주하는 경우에.. 보통의 경우처럼 비브라토를 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이용되는 것인데....  한 옥타브 위의 G음 (즉, D선의 1포지션 솔)을 누르고, 낮은 G선을 개방현으로 연주하면서 한 옥타브 위의 G음을 비브라토를 해주면, 공명현상을 통해서, 비브라토와 유사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자세한 내용이 뭐가 되든지.... 활비브라토라는 고난이도 테크닉을 구사하는 초보 여러분들 (저를 포함해서^^) 화이팅입니다^^;;

Posted by 슈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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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dge Anatomy에 걸맞는 명칭들이군요.
 
출처: http://violinbridges.co.uk/
 
위의 명칭 알아도 그다지 인생에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
나름 정보이니..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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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에서.. 아델라이데 협주곡의 진위도 역시 의심스럽게 여겨지고 있다고 하네요..


http://www.mozartforum.com/Lore/article.php?id=040&pt_sid=71f5cde08ba54f47d8f623fed00769ba


KV.Anh294a Adelaide Violin Concerto


Dennis Pajot

(이사람..위 주소의 모차르트포럼 사이트 운영자군요...^^)


아델라이데 협주곡은 1933년 Marius Casadesus에 의해 편집, 출판되어졌다. Jelly d'Aranyi가 런던에서 초연했다. (이 부분은... 좀 이상하군요. 메뉴인 연주가 1932년 녹음이라고 되어 있던뎅.....ㅡㅡ;;; 뭐가 맞는 건지 몰겠네요...) Casadesus에 의해 아델라이데로 명명되었는데, 그가 작업한 짧은 악보는 두 개의 보표 위에 서명이 있었고 - 위의 것은 독주부분 (D)에, 아래것은 베이스 (E)에 - 루이15세의 큰딸인 Adelaide de France부인에게 헌정되어졌다고 쓰여 있었으며 1766년 5월 26일, 베르사이유라고 되어 있었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 소위 서명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의심스러웠는데, 이것이 프랑스의 개인 소장품이라고 주장되어졌지만, 그 당시의 전문가들 (당시 뛰어난 모차르트 전문가인 Georges St.Foix를 포함하여)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것이었다. 또 다른 뛰어난 전문가인 알프레드 아인슈타인 (알버트 아인슈타인과 친척이긴 하나 다른 사람입니다^^;; 유명한 음악학자죠)는 그 서명을 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 출판사인 Schott도 서명을 봤다라고 얘기하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은 1934년 처음으로 이 작품의 근원을 분석했다. 그는 왜 이 협주곡이 레오폴드 모차르트가 1768년 작성한 그의 아들의 작품목록에 빠져있는지를 의문시했다. 아인슈타인은 또한 모차르트 일가가 1766년5월28일에 베르사이유에 도착하였고 (작품이 헌정되었다고 주장되는 날보다 2일 뒤이다) 6월1일에 파리로 돌아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왜 모차르트가 미완성된 작품을 헌정했는지도 질문했다. 그는 만약 볼프강이 "협주곡을 쓰길 원했다면, 그는 협주곡으로 썼을 것이지, 두 오선지로 쓰지 않았을 것이고, 모차르트는 총보를 다루는 일에 아주 익숙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그 작품의 스타일이 모차르트 후기 작품으로 부터 나온 것 같다고 믿었다. 이러한 모든 증거들로 인하여 아인슈타인은 이 작품이 모차르트의 작품이라는 점을 의심했다. 그러나, 혹시 네델란드에서 스케치된 "변주곡"의 잃어버린 부분이며 나중에 파리로 간 것일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함으로서 약간의 가능성은 남겨놓았다.


10년후,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모차르트 책에서, 이 협주곡은 Casadesus의 크라이슬러 식의 신비화된 곡이라고 부드럽게 서술했다. (크라이슬러가 본인의 곡인데도 마치 예전 작곡가의 곡인 것처럼 하곤 했다는 군요. 그래서 Casadesus도 본인의 곡을 모차르트의 곡인 것 처럼 신비화 시켰을 수도 있다는 뜻인 것 같네요. -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고클에 물어봤더니 어느 분이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Friedrich Blume은 1956년에 이 헌정에 관한 문제의 해결점에 도달했다. 원고와 헌정사는 서로 전혀 관계가 없으면 우연히 같이 있게 된 것이라는 것; 그리고는 놀라운 이야기를 했는데 "그 근원을 알 수 없다면 그 작품과 서명 모두를 부인하는 것 보다는 가설을 세우는 것이 훨씬 낫다"라는 것.. 그리하여, Blume은, 1764년의 바이올린 소나타 작품 1과 2에 있는 것과 비슷한 그 헌정사가.. 볼프강의 알려지지 않고 실종되었던 또 다른 작품에 대한 헌정사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도록 했다. 그는 이 작품에 대한 질문들에 대답을 하는 것보다는 "그 질문은 이제 별로 흥미 있는 것이 아니다"라도 말했다. !!!! Blume은 아델라이데 협주곡이 K207,  K211과 구조적으로 비슷하다고 보았고, 이 두 곡이 아델라이데를 능가하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그는1775년 4월과 7월 사이에 스케치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 없다"고 믿었다.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세계에서 이 곡을 밀고 있는 단 한 사람은 에후디 메뉴힌이었다. 그는 이 곡을 7번 협주곡과 같이 녹음했다. K6 (나중에 6번째로 다시 매겨진 쾨헬 번호)체계에서는 이 곡을 Anh C (Anhang, 쾨헬 목록의  appendix인데, 의심스럽운 작품들을 그 쪽으로 넣더군요) 섹션에 넣고 있으며, New Grove (음악백과사전)는 이 곡을 단순히 위작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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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역시.... 제가 번역하니 뭔말인지 종잡을 수가 없네요...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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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사진들은 Beethoven-Haus Bonn 이라는 독일의 본에 있는 Beenthoven-Haus의  공식웹사이트에서 가져왔습니다.
이것들 중에서 어느 것으로 연주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아마 이중의 어느 것도 아닐 수도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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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바이올린
Violine, Beethovens Gei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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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의 Hofkapelle (궁정 오케스트라??) 에서 베토벤이 연주하던 악기.
Viola, Beethovens Dienstinstrument in der Bonner Hofkapelle
 
이 악기는 베토벤이 1786년 부터 1790년까지 연주했고, 1789년 부터는 궁정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할 때 쓰던 악기랍니다. 그 후 Ries가문에서 연주되고 수리되면서 전해져 왔구요. 제작자는 누군지 모르지만, 18세기 전반기에 만들어진 악기일듯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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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학생용 바이올린, 1910년
Schülergeige Ludwig van Beethovens, um 1910 - Anonyme Fotograf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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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streichquartettinstrumenten (caper quartet 악기들)
 
첼로는 School of Nocola Amati
바이올린 중 하나는 Pietro Antonio Landolfi의 것일 가능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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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슈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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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가 너무 작아서 워드에 붙여놓고 읽다보니 번역이 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하다보니, 역시 번역은 내 적성이 아니다... 어쨌건.. 대충^^;; 베흐스버그가 어디다 쓴 글을 이 웹사이트가 가져온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하이페츠의 어느 CD안의 설명서인지 Note인지가 아닐까 싶다. 이 사람.... 상당한 하이페츠의 팬이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중간 (회색글자) 은 번역이 귀찮아 이덕희씨책이 이 글을 인용하고 있는 부분을 다시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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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 can be no doubt today that Jascha Heifetz is the greatest violinist of our generation. When all is listened to and said and done, Heifetz' supremacy as fiddler and musician emerges as one of the few unchallenged facts of our clouded musical age.

 

오늘날 야샤 하이페츠가 우리세대에서 가장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라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모든 것들을 들어보고 이야기 해보았을 , 하이페츠의 바이올리니스로서, 음악가로서의 최고 우위는 우리의 구름낀 음악의 시대에 도전받지 않을 진실이다.

 

I've been an ardent Heifetz fan since I first heard him one night in the 'twenties in Vienna's Konzerthaussaal when he performed the Mendelssohn Concerto. Like other Heifetz fans I've taken a proprietary interest in him and am secretly as pleased with his artistic durability as smart investors are with their IBM shares which they bought at 100 and watched go up and up all these years. Heifetz has always been a gold-plated investment for the listener; no matter what happened to others, he would pay off his regu­lar dividends.

 

나는 하이페츠가 ‘twenties in Vienna’s Konzerthaussaal’에서 멘델스존 협주곡을 공연했을 , 처음 그의 연주를 들은 이후로 그의 열광적인 팬이었다. 다른 하이페츠의 팬과 마찬가지로, 나는 우선적인 관심을 그에게 두었고, 그의 예술적인 내구력에 남몰래 즐거워 했는데, 이는 현명한 투자자들이 100 IBM주식을 사서 주가가 상승하는 것을 년간 보는 것과 비슷하다. 하이페츠는 언제나, 청중들에게는 금딱지가 붙는 투자였다. 다른사람들이 어떻게 되던, 하이페츠는 정규배당을 지급하곤 했다.

 

It has become a popular indoor sport in our concert halls to judge a performer not by the tens of thousands of right notes he plays in one concert but by the four or five false ones. It is almost impossible to hear Heifetz play five false notes in one evening, and some listeners amuse them­selves watching out for passages of "cold tonal beauty" or matching him against other prominent fiddlers—as if art­ists were ballplayers. These indoor sportsmen have to admit that Heifetz' batting average has been consistently high. And although the myth of his "brilliant coldness" persists in certain circles, he can still make it as hot for other fiddlers as some thirty years ago in Carnegie Hall when Leopold Godowsky made his famous crack that it wasn't hot in there during a Heifetz recital—not for pianists.

 

연주가를 그가 연주하는 수만의 '맞는' 음표들에 의하여가 아니라 4-5개의 '틀리는' 음표에의 하여 평가하는 것이 콘서트홀에서의 인기있는 실내스포츠가 되어간다. 하이페츠가 하루 저녁에 5개의 틀린 음을 연주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몇몇 청중들은 차가운 음색의 아름다움 가진 패시지를 지켜보거나, 하이페츠를 다른 유망한 바이올리니스트 들과 견주는 것을 즐긴다 마치 예술가들이 야구선수들인 처럼. 이들 실내 스포츠맨들은 하이페츠의 타율 평균이 지속적으로 높다는 인정하여야 것이다. 그리고 몇몇 그룹들에서 주장되는 그의 빛나는 차가움 신화에도 불구하고, 30년전에 고도프스키가 카네기홀에서 (하이페츠의 카네기홀 리사이틀만큼 뜨거운 공을 아니지만) 유명한 타격을 가했을때처럼, 하이페츠는 여전히 다른 바이올리니스트에게 뜨거운 공을 있다.

 

An artist is the image of his times. Paganini's contem­poraries loved his stupendous technique, Kreisler's his warm, glowing tone. Today we take for granted Heifetz' technical prowess and disciplined emotion (which to some people may sound like "cold tonal beauty") before we even discuss his spiritual interpretation of a work. I am assured that G. B. Shaw really told young Heifetz "to make a habit of playing one wrong note every night before going to bed." Shaw knew that perfection per se was a dangerous thing because it implied mechanized, soulless virtuosity.

 

예술가는 시대의 초상이다. 파가니니의 동시대인들은 그의 불가사의한 기교를 사랑했고, 크라이슬러의 따뜻하고 빛나는 음색을 사랑했다. 오늘날 우리는 그의 작품에 대한 정신적인 해석을 논의하기에 앞서서, 하이페츠의 기교적인 솜씨와 훈련된 감정 (어떤 사람들에게는 차가운 음색의 아름다움으로 들리는) 당연하게 여긴다. 버나드 쇼 어린 하이페츠에게 잠자리에 들기전 틀린 음을 한음 연주하고 자는 습관으로 삼으라고 말했다고 한다. 쇼는 완벽 자체가 기계적으로 있으며, 영혼이 없는 기교가 있기에, 위험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I remember one afternoon in Beverly Hills when I asked Heifetz, after a long talk, how he'd played an extremely difficult passage in a concerto that had puzzled me as well as a lot of fellow fiddlers. Heifetz nonchalantly picked up his Guarneri and performed the atrocious passage for me so quickly and easily that I was unable to see how he'd done it. I asked him whether he would do it once more. He obliged—and again I hadn't the faintest idea how he'd done it. Seeing the blank look in my eyes, he shook his head sadly at such ignorance. To this day I don't know how he'd played that passage; and I bet there are a lot of able fiddlers who wouldn't know it either if they saw it. It must be very lonely up there where Heifetz performs.

 

나는 비벌리힐즈의 어느 오후를 기억하는데, 그와 오랜 이야기 끝에 나는 어느 협주곡에서 나를 포함해서 다른 많은 바이올린 주자들을 당혹시켰던 극도로 까다로운 패시지를 그가 어떻게 연주했는가를 물었다. 하이페츠는 태연하게 과르네리 (페르디난트 다비드) 집어선, 나를 위해 지독한 패시지를 아주 빠르고 쉽게 연주해 주었는데, 도대체 그가 어떻게 연주했는가를 나는 도무지 수가 없었다나는 한번 연주해 있느냐고 물었고 그는 다시 한번 호의를 베풀었다 - 하지만 나는 그가 어떻게 그걸 연주했는가에 대해 손톱만큼도 없었다. 나의 눈에 나타난 멍청한 표정을 보고 그는 이와 같은 무지에 대해 슬프게 고개를 저었다. 이날까지도 나는 지독한 패시지를 그가 어떻게 연주했는가를 알지 못한다. 또한 맹세코 나는 숱한 바이올린 주자들도 설사 그들이 하이페츠의 연주를 가까이서 본다해도 나처럼 결코 그걸 없을 것이라고 단언할 있다. 이페츠가 연주하는 높은 곳은 매우 외로운 곳임에 틀림없다..

 

It isn't difficult to analyze Heifetz' greatness as a violin­ist but very difficult to get to the core of his art. Heifetz always sounds like himself, on his 1714 Stradivari, made in Cremona, or on a ten-dollar factory "Strad," made in Czechoslovakia. He is a great violinist because of his beau­tiful tone—which has a timbre all of its own—and the depth of his emotion, the incisiveness of his bowing, his impec­cable taste and sound instinct. (Asked by young Heifetz how he should play a certain passage, his great teacher, Leopold Auer, once said, "Play it with your nose; you'll make it sound all right.") Heifetz makes even the fasci­nating hillbilly passage in the Gruenberg Concerto sound wrong, as it should. No one has ever heard him play a false portamento.

 

하이페츠의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위대성을 분석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의 예술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이페츠는 크레모나에서 만들어진 1714 스트라디바리로 연주하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만들어진 10불짜리 공장제 스트라드 연주하던 항상 자신의 소리를 냈다. 그는 그의 아름다운 음색 모두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그의 감정의 깊이, 보잉의 날카로움, 흠잡을데 없는 취향 그리고, 소리에 대한 감각 등으로 인하여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인 것이다. (하이페츠의 스승인 레오폴드 아우어는 어느날 하이페츠가 어떤 패시지를 어떻게 연주하는 가를 물었을 , “코로 연주해라, 바른 소리가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이페츠는 그래야 했기 때문에 그루넨버그 협주곡에서의 환상적인 컨트리 뮤직 패시지를 심지어 잘못 소리내기도 했다.  누구도 그가 잘못된 포르타멘토 (슬라이딩 주법)를 연주하는 들은 적이 없다.

 

But there's a lot more to Heifetz, the artist. When he performed for the first time Prokofieff's G Minor Concerto No. 2, on December 17, 1937, with the Boston Symphony under Serge Koussevitzky, many listeners are said to have cried during the beautifully lyrical second movement. There are not many performers these days who would bring tears to my eyes, but Heifetz in his moments of lyrical expression is one of them. No artist can do that unless he's found the meaning of the music, the meaning behind the notes.

 

그러나 하이페츠에겐 많은 것이 있다. 예술가로서. 그가 1937 1217일에 Serge Koussevitzky 지휘하는 보스톤 심포니와 프로코피에프의 g단조 협주곡 2번을 처음으로 연주했을 , 많은 청중들은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2악장이 연주되는 동안 울었다고 했었다. 근래에는 눈에 눈물을 흐르게할 연주가는 많지 않다. 그러나 하이페츠는 서정적인 표현의 순간에는 바로 그런 연주가들 하나이다. 어떤 예술가도 음악의 의미, 음표 뒤의 의미를 깨닫지 않는 그렇게 없다.

 

The Prokofieff Concerto No. 2, which Heifetz recorded once before (with the Boston Symphony under Koussevit­zky), seems custom-made for him, with its lyrical sweep and incisive rhythms. This is the music of the new Russia —thumping steel hammers and blasting engine whistles instead of Ej Uchnjem Weltschmerz and Kremlin bells. The concerto is immensely alive, full of emotion—disciplined emotion, to be sure—and stimulating rhythm. The com­poser's brilliance for once is matched by the interpreter's brilliance. Watch out for the soaring sound of the solo violin in the first part and the devilishly difficult passages in 7/4 and 5/4 time in the finale. Or better, don't watch for anything. Turn off the light, close your eyes and enjoy yourself.

 

하이페츠가 녹음한 프로코피에프 협주곡 2번은 서정적인 흐름과 예리한 박자로 인하여 마치 하이페츠를 위하여 작곡된 음악처럼 보인다. 이는 Ej Uchnjem Weltschmerz (서글픈 러시아 노동요로 추정) 크렘린의 대신에 쇠망치를 두드리며, 엔진 휘슬을 울리 새로운 러시아의 음악이다. 협주곡은 거대하게 살아있으며 감정과 확실히, 훈련된 감정이다 자극적인 리듬으로 충만하다. 작곡가의 뛰어남은 해석자의 뛰어남과 어우러진다. 첫부분의 솟아오르는 바이올린 독주와 피날레 부분의 7/4, 5/4 박자의 악마적으로 어려운 패시지를 주시해 보라. 또는, 나은 방법으로, 아무것도 주시하지 말라. 불을 끄고, 눈을 감고 그리고 즐겨라.

 

Strangely enough, Heifetz has recorded the Mendels­sohn Concerto only once before, in 1949, with Sir Thomas Beecham; I would have sworn he'd done it at least three times. (In September 1920 he recorded the last movement as a solo piece, accompanied by Samuel Chotzinoff on the piano, but you will have trouble finding the recording which is a collector's item.) The Mendelssohn Concerto takes a special place in Heifetz' vast repertoire; he has played it on many important occasions of his career. Prob­ably the first was the evening in 1908, when little Jascha, aged seven, performed the concerto on a half-sized violin in Kowno, then in Czarist Russia, before an excited crowd of a thousand listeners. According to his biographers they were quite bewitched "by the smooth round tone he pro­duced and the masterly way in which his little fingers overcame the difficulties of the last movement. . ."

That was, mind you, fifty-one years ago.

 

이상하게도, 하이페츠는 멘델스존 협주곡을 한번만 토마스 비첨경과 같이 1949년에 녹음했다. 나는 그가 적어도 3번이상 연주를 했다고 맹세할 있다. (1920 9 그는 마지막 악장을 독주곡으로 새뮤얼 샤토지노프의 피아노반주와 같이 녹음했다. 그러나 음반은 구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멘델스존 협주곡은 하이페츠의 장대한 레퍼토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그의 경력에서 많은 중요한 순간들에 곡을 연주했다. 아마도 첫번째는 1908 저녁이었을 것인데, 그때 7살짜리 어린 야샤는 러시아의 코브노에서 흥분한 수천의 청중들 앞에서 1/2사이즈 바이올린으로 협주곡을 연주했다. 그의 전기에 따르면, 그들은 그가 만들어 내는 부드러운 둥근 소리와 그의 작은 손가락이 고난도의 마지막 악장을 극복하는 숙련된 방식에  황홀해 했다고 한다.

그것이 51년전의 일이 었다.

 

—joseph wechsberg Vienna, January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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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을 배워야 겠다는 야무진 꿈을 가지고 시작한지 일년이 되었다. 이렇게 열심히 하게 될 줄은 스스로도 전혀 몰랐었던 일이다^^


재미있게 살자... 라는 생각을 가지고 시작한 것들 중의 하나가 바이올린이었다. 20대말에서 30대 중반까지... 도무지 어떻게 지내왔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을만큼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사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라기 보다는... 어떤 목표의식이나, 명확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늘 매사가 확실하지 않은 채로, 하지만 어쩌다 보니 이리저리 휩쓸려가면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뭘 하고 있었는지, 왜 그러고 있었는지가 스스로도 아리송한 것이다.


결혼하고, 회사에 다니고, 아이를 낳고, 여러가지 복잡한 회사일, 그리고 아빠... 게다가 유학까지...


유학 역시 생각해보면 인생을 재미있게 살아보자는 생각에서 출발한 일 중의 하나 였는데, 그 과정이 별로 즐겁지 만은 않았었다. 그래서 더더욱, 그런 돌출행동 외에 일상생활을 유지하면서 즐길 수 있는 것을 찾아 보자는 생각이 들었는것도 같다. 그 중의 하나가, 바이올린...


긴 해외 생활을 끝내고 (길어봐야 2년 반도 안되었긴 하지만) 서울로 복귀하고 나서 한 것이 피아노를 사는 일이었다. 피아노가 그렇게 치고 싶었다.... 사실 잘... 치고 싶었는데, 고등학교때 그만둔 내 피아노 실력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해 국민학교 시절의 실력으로 돌아가 있었다. 뭐... 그래도 피아노를 치는 건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여러가지 악기를 배우는 일을 하고 싶었다. 클라리넷을 배우고는 싶었으나... 학원을 다닐 일이 걱정이 되었었고...


그러다가 바이올린을 공.짜.로 가르쳐 준다는 유스트링을 발견했다. 내가 바이올린을 결정적으로 시작하게 된 점에 있어서는 유스트링에게 큰 감사를 해야 할 것 같다. 사실 바이올린을 사는 것은 별 문제될 것이 아니었지만, 학원이나 선생님을 알아 본다는 것은 정말 귀찮은 일이어서, 그 당시에 계속해서 망설이고 있었었다. 그런데, 공짜로, 게다가 별로 쪽팔리지 않게 단체로 가르쳐 준다니... 딱 이거다.. 라는 생각에 바이올린을 지르고^^


3개월 무료 레슨으로 뭐가 되리라는 기대는 안했었고... 이제 슬슬 다른 학원을 알아볼까... 라는 약간의 갈등이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역시 귀차니즘 때문에 계속 유스트링을 다니게 되었었다. 그런데... 사람수도 작아지고, 또 조금더 배워 나갈수록... 점점 더 재미있어지는게 바이올린이었다^^


가을이 되고, 연주회 준비를 시작할 무렵부터는 정말 본격적으로 재미가 있었졌다. 여러가지 곡을 하고, 많은 사람들이 하는 걸 보면서 자극도 받고... 이것저것 바이올린에 대한걸 찾아보다가 바친기도 발견...


바친기는 유스트링에 이어 내 바이올린 사랑을 활활 타오르게 만든 또하나의 자극이었다. 와... 바이올린을 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니... 여기 이렇게 많은 정보들이 있다니...  정말 지난 몇달간, 무지 재미있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이 모두 바친기 덕분이었다^^


이러저러해서... 악기도 바꾸고... 사고... 바이올린 자체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연습도 더 열심히 하게 되고... 1년이 정말 금방 지나갔다...


그런데 왜 실력은 아직도 그 모양일까.... 매일 30분-1시간의 연습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던가.... 정말 나샘 말대로 한 10시간 연습해야 되는 걸까^^

----------------------------------------------------------------- 2006/05/16 09:52

바이올린을 배운지 1년이 되어갈 즈음에 적은 글.. 지금은 2년이 넘었으나.. 실력은 역시 제자리 걸음이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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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친기에 올렸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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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 레이블 읽는 법에 관한 글입니다. 악기에 스트라디바리라고 쓰여져 있던데 혹시 내 악기가 그 유명한 스트라디바리...??하시는 분이 계실까봐 적어봅니다^^


http://www.oriscus.com/mi/violin.htm

(이 글에 있는 정보 중 아주 기본적인 정보를 적어 봤습니다. 바친기 회원이라면 이정도는 알고 있어야 겠죠. 아는 만큼 보인다고 누가 그랬죠~~)


f홀을 통해서 바욜린 안쪽을 들여다 보시면, 보통은 뒤판 안쪽에 붙은 종이레이블을 보실 수가 있습니다. 만일 영어로 Made in Korea, Made in China... 라고 붙어 있다면, 상황은 아주 분명해집니다. 주로 최근 (20세기 후반이후 정도 되겠죠)에 만든 바이올린이며, 대량생산되었거나, 대량판매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꼭 수제가 아니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만약 레이블이 좀 오래되어 보이면서 악기자체도 소위 '올드'라고 불리우는 것처럼 생겼다면, 먼저 레이블의 내용을 해독해봐야겠죠. 물론, 레이블은 그 바욜린이 진짜라는 증거는 절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욜린의 진위를 판가름하는 수많은 정보 중의 하나이긴 합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스트라디바리는 "Antonius Stradiuarius Cremonenfis; Faciebat Anno 17__" 라고 프린트된 레이블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의 글은 라틴어라고 하는데요.. 의미는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 크레모나에서, 17XX년도에 만들었음... 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연도의 뒤의 두자리는 손으로 쓰여있게 마련입니다. 이게 사실 가장 보편적으로 무지하게 많은 악기에 붙어 있는 레이블의 형태입니다.


그런데, 바이올린 제작가는 스트라디바리만 있는게 아니죠.. 이태리의 유명한 바이올린 제작도시 크레모나에서는 250여년간 2만명 정도의 luthier가 바욜린들을 무지하게 많이 만들었습니다. 도시하나에서만 2만명입니다... 또,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만든 악기에도 빅토리아 시대에는 스트라디의 레이블을 붙이는 것이 매우 흔한 마케팅기법이었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들 악기들이 스트라디바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게 사기는 아니었구요^^실제로는 아주 잘 만들어져서 요즘 올드 대접을 받는 것들도 있습니다.


자.. 이제 레이블에 붙어 있는 해괴한 랭귀지를 분석하여 봅시다..


용어 사용례
faciebat, fece, fecit or me fecit made 만들어진 me fecit="made me" or "made by"
anno in the year 년도 Faciebat Anno 1723 = "1723년에 만듬."
et and 그리고^^  
in or a in or of (referring to a place name) 장소

a Brescia, 브레시아에서, in Mittenwald 미텐발트에서..

alumnus student of 누구누구의 학생  
nepos descendant of 누구누구의 후손  
nach (German) after, i.e., copy of, or in imitation of ~의 카피.. 따라서 만든...  
sub titulo patron saint ~의 후원으로 sub titulo S.Teresie, or sub tit: Sanctae Teresiae = "Saint Theresa의 후원으로"
Fr. or frater brother of ~의 형제  
filius son of ~의 아들  
라틴어로 쓰여있는 제작자 이름:
  • Stradivarius = 스트라디바리
  • Guarnerius = 과르네리
  • Amatus = 아마티

젤 유명한 세명의 이름이죠^^

흔하게 나오는 지역이름들:
  • Cremonae, Cremonensis, etc. = 크레모나.. 아까 위에서 언급한 이태리의 유명한 바욜린 제작 동네입니다. 이 동네에서 스트라디바리, 과르네리 등등 유명한 악기들이 만들어 졌고, 현재도 유명한 제작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 Mittenwald, Brescia, Markneukirchen, Mirecourt, Venetiis (Venice), Napoli, Milano 이런 도시들이 바욜린 레이블에 많이 등장하는 유명 도시들입니다.

요약하여 말씀드리자면...레이블은 바욜린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을 수 있으므로 읽어보아야 한다. 스트라디바리의 레이블이 붙어 있다고 해서 스트라디바리는 아니다. 한때는 그렇게 레이블을 붙이는것이 일반적이기까지 했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Made in Germany (or Hungary, Italy, Czechoslovakia, etc.)라고 쓰여 있는 레이블에 관해서...

 

1891년 부터 미국으로 수입되는 모든 제품에는 원산지 표기가 의무화 되었고, 1914년 이후에는 "Made in~"이라는 표기가 의무화되었습니다. 1921년에는 모든 나라이름도 영어로 표기되어야 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Made in Italia는 1921년 이전에 제작되어 미국으로 들어간 악기이고, Made in Italy는 1921년 이후 악기일 수 있겠죠^^ 독일의 경우에는 "Made in Germany"는 1921년에서 2차대전까지 만들어진 악기일 것이고 "Made in West (or East) Germany"는 2차대전이후 부터 독일통일이전까지의 악기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표기들은 이 악기들이 미국시장으로 수입된 악기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악기에 스트라디나 과르네리의 레이블이 붙어 있으나, 뒤에 Made in Germany라고 되어 있다면.. 일단 20세기의 대량생산 악기라는 생각을 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20세기 초라고 해서 대량생산 악기들만 있는 건 아닐테구요, 당연히 그 시절에도 훌륭한 악기들이 만들어 지고 있었겠죠. 또 그시절의 대량생산 방식으로 만든 악기들이라도, 일부 지역에서 생산된 악기들은 상급용 바욜린으로 손색없는 제품들이었다고 합니다.

Posted by 슈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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