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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공부/알아보기'에 해당되는 글 34건

  1. 2015.01.23 전람회에는 어떤 그림들이 있었을까
  2. 2009.11.24 Henryk Wieniawski, Legende op. 17 4
  3. 2009.09.20 재미있는 영상 - crab canon 눈으로 보기
  4. 2008.07.02 다시 문을 연 IMSLP!
  5. 2008.04.24 도레미송... 우트레미송... 2
  6. 2008.02.18 프랑수와즈-조세프 고섹 1734-1829
  7. 2008.02.17 German organ tablature 2
  8. 2008.02.16 묵주 소나타와 scordatura 4
  9. 2008.01.27 Happy Birthday to you! 4
  10. 2008.01.19 J. S. 바흐의 '커피 칸타타' (BWV 211) 1
  11. 2008.01.05 [번역] "아마데우스"와 모차르트: 기록 바로 세우기 (6)
  12. 2008.01.05 [번역] "아마데우스"와 모차르트: 기록 바로 세우기 (5)
  13. 2008.01.05 [번역] "아마데우스"와 모차르트: 기록 바로 세우기 (4)
  14. 2008.01.05 [번역] "아마데우스"와 모차르트: 기록 바로 세우기 (3)
  15. 2008.01.02 [번역] "아마데우스"와 모차르트: 기록 바로 세우기 (2)
  16. 2007.12.28 [번역] "아마데우스"와 모차르트: 기록 바로 세우기 (1)
  17. 2007.12.02 그녀, 파트리샤 쁘띠봉 10
  18. 2007.11.23 감동적인 연주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2
  19. 2007.10.26 [번역] 예외들의 초상: 난넬 모차르트, 파니 멘델스존, 클라라 슈만 5
  20. 2007.10.03 [곡해설] 시벨리우스 핀란디아 Op. 26
  21. 2007.09.29 [곡해설] 드보르작 교향곡 8번 G장조, 브루흐 비올라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로망스 Op.85
  22. 2007.09.27 Max Bruch, Romance in F major for Viola and Orchestra, Op. 85
  23. 2007.09.10 Dvorak, Symphony No. 8 in G Major Op. 88에 대해 2
  24. 2007.09.05 Schumann, Carnaval, Op. 9
  25. 2007.08.20 [번역] 모차르트 즉흥연주하기 by Robert Levin 3
  26. 2007.08.17 L'estro Armonico 곡의 구성
  27. 2007.08.15 [번역] 크리스토퍼 호그우드가 이야기하는 "VIVALDI: L'Estro Armonico, Op . 3" 2
  28. 2007.01.04 Peter kiesewetter, Tango pathétique
  29. 2006.12.22 [번역] Variations on a Theme of Tchaikovsky, Op. 35a
  30. 2006.12.20 [스크랩&번역] 활비브라토....ㅡㅡ;; 1

이번 3월에 우리 오케스트라에서 공연하기로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라벨의 오케스트라 편곡). A6에서 쭉쭉 위로 올라간 3옥타브 음들과 들락나락 임시표에 익숙해 지지 않는 손가락 때문에 고생 중이기는 하지만 멋진 곡이긴 같다. 예전부터 이건 도대체 어떤 그림들로 만든 걸까 궁금하긴 했었는데 이번 기회에 찾아 보고 나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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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람회의 그림. 어린 시절 피아노로 프롬나드를 배웠던 기억은 있지만 프롬나드와 키에프의 대문말고는 그다지 친근하지는 않은 곡이긴 한데요그래도 자꾸 해보니 아주 쬐끔씩 익숙해지는 같기는 합니다물론 길이 구만리지만요 ㅋㅋ

 

각설하고... 아시는 바와 같이전람회의 그림은 무소르그스키가 친구였던 화가 빅토르 하르트만 Viktor Hartmann 요절한 후에 열린 유작 전시회를 보고나서 바로 작곡한 곡이지요. 10개의 그림에 대한 느낌을 이야기로 담았는데지금까지 5개의 그림만이 알려져 있었다고 해요그런데최근 일본분들이이 곡에 사용된 그림일 가능성이 높은 나머지 그림을 추가로 찾아냈다고 하네요. NHK에서 그림을 찾는 여정이 방송이 되었고 관련 서적도 출간이 되었다네요그림과 자세한 설명은아래 링크 (제가 참고한 링크는 영문인데, 일어 잘하시는 분들은 일본어 사이트를 보셔도 좋을 같아요)

http://www.geocities.jp/tatsuyabanno/Bilderausstellung/Bilderausstellung-e.html

http://www.geocities.jp/tatsuyabanno/Bilderausstellung/Bilderausstellung.html

 

No. 1 "The Gnome" (Latin, Gnomus) 난장이

 

그림은 분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만...  일본분들이 찾아낸 그림은 이렇습니다무시무시한 난장이같아 보이는데사실은 크리스마스 트리에 장식으로 사용하는 장난감을 데생한 것이라고 합니다호두까기 인형 같은 것이라고

  

 

 No. 2 "The Old Castle" (Italian, Ilvecchio castello): 

 

다음의 3그림이 가능성이 있다고 하네요음악을 들으시면서 어느 그림이 가장 음악과 맞을지 한번 상상을....

 

 

 

 

No.3 "Tuileries"(French, Tuileries: Dispute d'enfants apres jeux) 튈르리 궁전놀이 후에 싸우는 아이들

 

역시 찾지못하던 그림이었는데다음 그림들이 가능성 있다고 합니다작아서 안보이지만요오리지날 노트에는 Tuileries, quarrel of children after play"라고 되어 있다고 하네요 그림이 맞을까요?

  

 

No.4 "Cattle" (Polish, Bydło) 소달구지

 

"A Polish load cart with big wheels drawnby a cow"라고 설명이 되어 있는 소달구지죠역시 그림이 알려져있지 않았는데요아래 그림을 보시면 소달구지가 안보이네요해석에따르면.... 사실은 소달구지가 아니라 압정에 시달리는 폴란드민중을 그냥 소달구지로 은유한 것이라네요.아래 그림은 '폴란드에서의 반란'이라는 제목을달고 있다네요. ( 보시면... 그림에 처형대가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곡은 장송곡처럼 매우 슬프게 연주해야 한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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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냥 소달구지 그림이 떡하니 올라와 있을 알았는데 (실제로 그런 그림을 올려 놓은 설명자료들도 있음), 폴란드 민중을 은유한 것이라니... 조금 충격 받았다. 갑자기 음악이 다르게 들리기 시작. 우리 연주도 느리게 걷는 달각거리는 달구지가 아니라 슬픔과 분노의 느낌을 표현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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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5 "The Ballet of Unhatched Chicks in their Shells"  Ballet des poussins dans leurs coques 껍질 붙은 병아리들의 발레

 

그림은처음부터 알려져 있던 5개의 그림 하나입니다발레복 디자인을 요청 받고 그린 데생이라고...

  

  

No.6 "Samuel Goldenberg and Schmuyle" (Samuel Goldenberg und Schmuyle)

 

이것도 역시 알려져 있던 그림들이구요별개의 장의 그림을 곡으로 묶은 것입니다무소르그스키는 핍박받는 유태인들에 대한 공감을 나타냈었다고 하는데요그림의 주인공들도 유대인들입니다 명은 부자 그리고 명은 가난하죠둘을 하나의 음악에 담아서 말하고자 했던 바는 무엇이었을까요?

(곡에서 안단테 테마는 사무엘을, 안단티노의 2주제는 쉬뮬(발음이 ;;) 나타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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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도 제목에 신경을 쓰지 않고 들었었는데, 해설을 보고 나니 잉글리시 호른과 클라리넷이 표현하는 부유한 유대인 사무엘과 트럼펫이 표현하는 (도입부에 오보에가 있음) 쉬뮬 그리고 둘의 대립이 보이는 무척 재미있는

  

 

 No.7 "The Market at Limoges (The Great News)" (French, Limoges, lemarche (La grande nouvelle)) 리모주의 시장

 

Limoges 파리에서 400킬로미터 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라네요전시회에서는  70장의 Limoges 스케치가 들어 있었대요. 중에"시장" 그림은 없었나봐요그러나 여자 둘이 심하게 싸우는 모습이라는 무소르그스키님의 설명이 있었다니 아마도 두번째 첫번째 그림이 비슷하지 않을까요 

 

 

 No.8 "Catacombs" (Latin, Catacombæ (Sepulcrum romanum) and Con mortuisin lingua mortua

카타콤, 지하묘지

 

이것도 알려진 그림이죠수채화라는데.... 정말 음울합니다빠리에 있는 지하묘지인데 밑에 랜턴을 들고 있는 것이 하르트만 본인이래요 

 

 

 No.9 "The Hut on Fowl's Legs"  Lacabane sur des pattes de poule 닭발 위의 오두막

 

아래 그림은시계인데요시계가 다리가 달려 있고 뼈다귀로 울타리를 마녀 Baba Yoga 오두막 모양을 하고 있다는 군요.  음악이 강렬해서 소비에트 시대에는 혁명에서의 민중의 힘으로 해석 되기도 했다는 군요. 

 

  

No.10 "The Great Gate of Kiev"  Lagrande porte de kiev

 

유명한 키에프의 대문입니다키에프는 우크라이나의 수도인데요. 11세기에 골든 게이트가 전승 기념으로 지어진 모양입니다 그림은 1869년에 키에프 건축을 위한 공모전에서 우승한 그림인데 결국 건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공모전은 1866 4 알렉산더 2세가 키에프에서 저격당할 뻔하였다가 살아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 기획된 것이라는데요. 아마도 저런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 문을 세운다는 것이 ... 그래서 취소된 합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어떤 대단한 그림들이길래 이런 음악이 나왔을까 궁금했는데 찾아보고 나니 제가 그동안 상상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그림들이네요. 전반적으로 우울하고 생각할 여지도 많이 주는 그림들입니다. 서유럽의 밝고 고급스러운 전람회까지는 아니어도 비슷한 분위기를 생각했다면 충격적이기까지 정도

 

그림에 무지한 지라, 그림들의 예술적인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무소르그스키의 음악이 그림보다 훨씬 풍부한 느낌을 주는 같긴 합니다. 아마도 그림에 대한 감상에 일찍 친구 하르트만에 대한 애정이 더해지고 그림의 배경이 이야기까지 곁들여져서 이렇게 멋진 음악을 만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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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적어 놓은 웹사이트 말미에는 차이콥스키 콩쿨에서 전람회의 그림을 연주했던 Mikhail Ermolaev 심사평이 인용되어 있다

 

"Ermolaev tried to remove any kind of romanticism and of oily picturesqueness. He must have imagined a tragic fresco. Three pieces were most impressive. 'Bydlo' was played at a tempo of a funeral march. 'Sumuel Goldenberg und Shmuyle' was no longer descriptive. It indicated the strength, a battle of two intentions. 'Catacomb' was the climax of the whole suit (if the suit is tragic at all). He avoided sounds masked with fog. That was really great. Moussorgky must have wished that the piece should be interpreted like this".

 

그리도 다음은 연주자 Ermolaeve Bydlo 대한 답변. "It looks very simple, but the accompanying part of this piece reminds me of the "funeral march" of Chopin whereas the melody part does of the tragic scene in the opera "Khovanchtchina". It is too mysterious to describe a cow with a cart because it is unknown why the title is 'Bydlo' and why it sounds so tragic.

 

어릴 적에 전람회의 그림이라는 제목을 보고 즐겁고 밝은 곡일 것이라고 짐작했었고 프롬나드도 웅장하지만 우울하지는 않아서 아마도 뒤에는 밝은 내용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생각보다 곡이 우울하고 어려워서 ... 뭐지 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림들을 보고 나서 악보를 보니... 이건 전람회의 그림을 그린 대표적인 표제음악... 이라고 생각했던 곡이 마치 절친한 친구의 죽음에 바치는 장송곡같은 느낌으로 바뀐 느낌.

 

 

 

 

Posted by 슈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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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진득진득하고 끈적끈적한 곡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는 하지만... 가끔은 무지하게 로맨틱한 곡이 땡길 때도 물론 있다. (사실은 자주 있다^^;;) 비에냡스키 선생의 "전설"... 쇼팽 선생과 마찬가지로 폴란드 출신이라서 그런지, 독일 같은 서유럽 부자 나라의 작곡가들의 곡들과는 다른 특유의 감수성이 느껴진다. 뭔가 고생 좀 해본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절절함이랄까... (너무 오버했나..?)

 

그나저나... 과연 이 곡을 비슷하게라도 연주할 수 있을지는 매우 의문시 된다. 아마도 선생님이 도저히 지겨워서 더는 못 가르치겠다 싶으면 넘어가지 않을까.

 

상당히 끈적한 감수성을 요구함과 동시에 제일 못하는 겹음까지 해야 하고, 중간에 턱도 없는 크로마틱 스케일 (또는 걍 글리산도로 ...;;)까지 주욱 나와 주시며 막판에 아르페지오 연타로 날려 주시는 이 곡은....

 

비에냡스키가 사랑에 빠졌던 이사벨라 햄프턴의 부모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작곡한 곡이라고. (이 곡은 이사벨라 햄프턴에게 헌정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위 악보 표지 참조.) 약혼을 반대하던 햄프턴의 부모는 이 곡이 연주되는 것을 듣고는 혼인을 허락했고, 비에냡스키는 이사벨라와 1860년 결혼에 성공하여 아이를 여섯 명이나 낳고 잘 살았다고...; (사실 말년에 지병으로 고생하다 45살에 생을 마감했으니 꼭 잘 살았다고 볼 수 만은 없을 듯.)

 

어쩐지 g minor로 시작했다가 장조로 전조하는 부분에서 자신감이 팍팍 느껴지더라니, 이미 곡을 지을 때부터 결혼이 성공할 것을 예감한 것인지... 아니면 이사벨라의 부모가 그의 자신감에 믿음이 생겨서 딸을 주기로 했던 것인지...

 

아래는 Kogan이 연주하는 "전설". 동영상은 아니고 음원에 사진만 띄워 놓은 것. 네이버 검색하니 길샤함 등 꽤 곡 분위기에 어울릴 만한 아저씨들의 연주가 꽤 있는 듯 하다.

 

 

 

 

아래는 Kevin Yeung, violinist / Ben Tin, pianist의 Non-Commercial Recor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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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의 음악의 헌정에 나오는 crab canon의 구성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영상이다. 1747년 포츠담을 방문하고 프레드리히 황제를 만난 바흐가 황제가 준 (좀 심술궂은) 주제로 즉흥연주를 했던 곡에 몇 곡을 덧붙여 내놓은 것이 음악의 헌정.

 

 

아래의 canon은 황제의 주제를 담고 있는 캐논의 첫 곡으로 crab canon 또는 cancrizans이다. 악보만 보고 곡을 머리 속에서 재구성하여 연주를 상상하기는 어려운데, 아래 동영상은 어떻게 곡이 이루어져 있는지를 매우 잘 보여준다.

 

이 캐논에 대한 간단한 설명은 여기 (영어임).

 

출처: http://strangepaths.com/canon-1-a-2/2009/01/18/en/

 


 

  1. Animation created in POV-Ray by Jos Leys. Music performed by xantox with Post Flemish Harpsichord, upper manua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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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imslp.org/wiki/Main_Page

작년 10월에 문을 닫은지 9개월만인 지난 6월30일 다시 오픈을 했다고 한다. 여러가지 악보 관련한 사이트가 많기는 하지만, IMSLP만큼 자료가 많지는 않았기 때문에 IMSLP가 문을 닫는다는 것이 무척 아쉬웠었다. 그런데 법률적인 검토를 거쳐서 다시 오픈을 했다고 하니 반가운 일이다.

모든 악보를 다 살 수도 없는 일이고 가끔 몇 가지가 궁금해서 찾아 보고 싶을 때 저작권 문제가 없는 악보를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매우 편리한 일이다. (한국 법상으로도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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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는 역시 별게 다 있다. 요한찬미가 또는 Ut queant laxis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Ferenc LISZT Choir 가 부른 것.


그리고 이건 요한찬미가의 솔페지 버전.... ^^;; 교수님이 친절하게도 본인의 손을 가르쳐 가면서 귀도니안 핸드를 설명한다.



그리고 요한찬미가의 악보와 가사


Ut queant laxis
 by Paolo Diacono (Paul Varnefrido) (ca. 720 - ca. 799)
 
Ut queant laxis
resonare fibris
Mira gestorum
famuli tuorum,
Solve polluti
Labii reatum, Sancte Joannes.

“당신의 피조물들이 당신이 행하신 일,
그 아름다움을 자유로이 노래할 수 있도록
그들의 누추한 입술에서 모든 죄악의 그늘을 씻어 주소서!
성요한이여”


이번엔 스페인의 산토 도밍고 데 실로스의 베네딕토 수도사들의 음성으로...

그레고리안 성가의 옛날 악보 from http://www.ceciliaschola.org/

그리고 귀도니안 핸드.

Image:Guidonian hand.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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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çois-Joseph Gossec (1734-1829)

가보트와 탕부랭으로 유명한 고섹. 어린이를 위한 음악을 주로 작곡한 작곡가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만큼 발랄하고 아름답고 신나는 선율의 곡들이다.

고섹은 1734년 1월17일에 네덜란드 남쪽의 베르니스 (현재는 벨기에)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고, 17세에 프랑스로 건너간 이후로 프랑스에서 작곡가로서, 지휘자와 음악감독으로, 또 교수로서 일생을 보냈다. 그는 요한 슈타미츠의 영향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교향곡 형식을 익혔고, 라모의 지휘 하에서 바이올린과 베이스를 연주하기도 하였다. 수많은 교향곡을 써서 프랑스에서 교향곡을 대중화시켰고, 줄곧 귀족들을 위한 오케스트라와 오페라좌에서 일했었지만,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공화주의자로서 신체제를 옹호하며 혁명 대중을 위한 음악들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프랑스 학술원 및 콩세르바튀르의 창립멤버이기도 했으나, 나폴레옹이 득세하고 다시 귀족정치가 시작되자 물러나 후학을 양성하는데에 몰두한다. 나폴레옹의 워털루 패전 후 콩세르바뛰르가 문을 닫자 그는 파리교외의 파씨로 은퇴한 후 9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고섹은 서정적인 곡을 쓰는 재능과 오케스트라의 소노리티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 둘은 결합되어 그의 최고의 작품들에서 뛰어난 효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바대로, 요한 슈타미츠의 강한 영향을 받았으나 매우 독자적인 면도 있었다. 후기 교향곡들은 충만한 소노리티와 뛰어난 관파트가 있는 훌륭한 작품들이다.

그는 실질적으로 18세기 프랑스 음악을 이끌며 많은 작품을 쓴 다재다능한 작곡가였다. 그는 화성적인 상상력과 소리의 질감에 대한 감각에 의존하여 오케스트라의 역량을 증가시켰다고 한다. 또한 그는 낭만주의를 예고하는 많은 실험을 하는데, 예를 들어, 그의 테 데움 (1779, 1200명의 가수와 300명의 관악주자)은 훗날 베를리오즈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그의 음악에 있어서 분명한 형식과 오케스트라 색채의 혁신은 프랑스 기악음악 발전에 강한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 밖에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라고 할 수 있으나, 모차르트와 베를리오즈는 그의 레퀴엠을 극찬하고 자기들의 장례미사곡의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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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가 타블라추어를 쓰고 있다는 것은 많이 알고 있고, 류트나 옛 현악기들의 경우에도 타블라추어 악보들을 많이 쓰고 있는 것도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다. 사실 현들 위에서 운지를 하는 현악기의 경우에는 타블라추어 악보를 어떤 모습일지 충분히 상상이 간다.

아래는 비후엘라의 타블라추어.
(Sample of numeric vihuela tablature from the book "Orphenica Lyra" by Miguel de Fuenllana)
Image:Vihuela-Tab Fuenllana 1554.jpg

그런데, 오르간 타블라추어는 과연 어떤 모습일지... 바흐의 전기를 읽고 있는 중인데, 그는 어린 시절에는 타블라추어로 공부를 했었고, 성년 이후에도 타블라추어 꽤 작업을 했던 것 같다. 오르간 타블라추어는 어떤 모습일까?

바흐 칸타타 사이트에는 이와 관련된 discussion이 있었던 것 같다.
http://bach-cantatas.com/Topics/Manuscripts.htm (아래 부분)

볼프의 하버드 강연
http://athome.harvard.edu/dh/wolff.html

몇 가지 링크를 따라가다 보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진 자료를 볼 수가 있다.
http://www.repubblica.it/2006/05/gallerie/esteri/bach-inediti-ritrovati/1.html

블로그에 올려도 될 지는 잘 모르겠지만... 살짝 옮겨 붙여 보면....
<B>Gli inediti manoscritti di Bach sopravvissuti alle fiamme </B>
<B>Gli inediti manoscritti di Bach sopravvissuti alle fiamme </B>

또 다른 악보 자료는 타블라추어와 오선지 악보가 비교되어 있다. Fantasia c minor BWV1121. 1982년에 발견된 타블라추어 악보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봐도 어떻게 비교해서 봐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ㅡㅜ)
http://bach-cantatas.com/Scores/BWV1121-Tablature.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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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버의 묵주소나타는 스코르다투라를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 귀로 듣는 것과 다를 수 있게 때문에, 이것은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시각과 청각간의 계속적인 괴리를 발생시킨다. 예를 들면, A라고 쓰여져 있지만 그것은 B 또는 G, 또는 또 다른 소리가 날 수 있는 것이다. 음표는 오선지 위의 F#이라고 되어 있지만, 그것은 한 옥타브 아래의 F일 수도 있다. 물론, 두 음 모두 다 전혀 F음과 비슷하지도 않은 소리가 날 수도 있는 것이다! 올라가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 내려가는 음일 수도 있거나, 올라가기 시작하다가 그 중간에 밑으로 뚝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11번 소나타에서처럼 가운데의 두 현이 사실 서로 엇갈려 있는 경우에는 오른쪽 현에 손가락이나 활을 대는 것 조차도 정신적으로 복잡한 체조를 하는 느낌이 들 수 있다! 비버가 이 곡을 쓰기 위하여 얼마나 어려웠을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실험을 했었을지 상상을 해보라!" - Walter Reiter

Tuning of the strings for Biber's Rosary Sonatas

Tuning of the strings for Biber's Rosary Sonatas


(그림 출처: http://www.jsbchorales.net/biber.shtml)

위에서 보듯이, 1번과 마지막 파사칼리아를 제외하고는 14개의 소나타 전부 스코르다투라가 사용되었다. 실제로, 예수의 생애의 신비스러움을 노래하고 있는 이 곡들은 색다른 조현법이 신비로운 느낌을 만들어 내는 데 도움을 주고 있는 듯 하다.

아래는 실제 현이 엇갈려 조현되어 있는 악기의 모습. 헤드 쪽 펙박스에서도 이 두 현은 서로 엇갈려 있을 것이다.
Image:Biber mysterien.jpg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모차르트의 신포티아 콘체르탄테에서 비올라도 가끔 scordatura로 연주되는데, 그 경우에는 피치를 반음 정도 올려서 약간 높게 조율하여 비올라의 음색을 더 밝고 두드러지게 하는 경우.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이나 말러 교향곡 4번 2악장에서도 쓰인다. 18세기 이후 바이올린의 경우에는 거의 쓰이지 않지만... 현대 음악에서는 종종 쓰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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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번째 생일을 축하합니다!!

작년엔 250년이라고 요란했었지요... 늘 변함없는 그의 음악에 감사를 보내며~~

Good Morning~!
 
Picture of Wolfgang Amadeus <small>(Amadé)</small> Mozart.
 
 
Picture of Wolfgang Amadeus <small>(Amadé)</small> Mozart.
 

사진출처: http://www.classical-composers.org/comp/mozartwa
그리고, http://shop.berliner-philharmoniker.de/index.php?cat=c14_Plakate-und-Postkarten.html&page=2

Posted by 슈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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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할 일이 없는 토요일. 토요일 아침 레슨을 그만두고, 지윤이도 방학이라 토요일이 정말 한적하다. 아점을 먹고 지윤이가 커피를 한 잔 가져다 주었다 (네스프레소를 사놓았더니 초등학생도 만들 수 있을 만큼 커피 만드는 것이 쉬워졌다^^). 맛난 커피를 마시면서 문득 바흐의 커피칸타타가 떠올랐다.

사람이 커피마시기 시작한 것이 대략 9세기부터 라고 한다. 유럽에 소개되어 널리 마시게 된 것은 17세기경이라고 하고, 최초의 커피집은 1645년에 이태리에서 문을 열었다. 바흐가 이 곡을 쓴 것이 대략 1732년에서 34년 사이라고 하니, 유럽에서 커피가 유행하기 시작한 지 대략 100년쯤 뒤가 되는 셈이다.

한국에 커피가 들어온 시기는 언제쯤일까? 보통 19세기 후반에 들어왔을 것이라고 한다. 서양문물들이 들어오면서 같이 들어왔던 모양이다. 당시 고종이 커피를 매우 즐겼다는 이야기도 널리 알려져 있는 걸 보면 그 무렵 왕실과 귀족들의 값비싼 기호품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로부터 100년도 더 넘은 지금은, 거리마다 커피점이 넘쳐 나고 종류도 너무나 다양해져 버렸다. 바흐시대처럼 딸이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신다고 혼내는 아버지는 별로 많지 않을 것 같지만... 커피로 엄청나게 돈을 번 별다방의 성공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고, '별'나게 비싼 커피값과 대조적으로 충격적일 정도로 싼 커피 산지의 임금, 그리고 이제 스스럼없이 비싼 커피를 소비하게된 우리나라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도 한동안 사회적인 관심을 끌었었다. 커피는 이래저래 수백년동안 사람들의 관심대상이고 화제거리를 몰고 다니는 모양이다.

원래 제목은 "Schweigt stille, plaudert nicht" ("조용하게, 떠들지 말고") 라는 것이지만 '커피칸타타라'는 제목으로 훨씬 더 유명하다.  18세기 바흐의 동네인 라이프찌히에서는 아마도 커피중독이 상당한 사회적인 이슈로 등장했었던 것 같다.  이 칸타타의 가사는, 바흐와 많은 작업을 같이 했었던 크리스티안 프레드리히 헨리키 (Christian Friedrich Henrici)가 썼다. 아래 가사 번역 참고.

이 곡은 라이프치히의 짐머만의 커피집에서 콜레기움 무지쿰의 연주로 초연되었었다고 한다. 원래 편성은 소프라노, 테너, 베이스, 트라베르소, 2바이올린, 비올라, 그리고 콘티뉴오.

글, 그림, 악보 및 설명

가사번역

1. 레시타티브

나레이터:조용하게, 떠들지말고 여기서 일어나는 일에 주의를 기울여 보세요: 여기 헤르 슐렌드리안이 딸인 리첸과 같이 있군요. 그는 곰처럼 으르렁대고 있어요. 딸이 아버지에게 한 일을 좀 들어 보세요!

2. 아리아
슐렌드리안: 자식들은 끝없는 시련과 고난을 일으킨답니다! 제가 매일같이 내 딸 리첸에게 말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군요

3. 레시타티브
슐렌드리안: 이 말도 안듣는 나쁜 녀석아. 아, 언제야 내 말을 들을거니? 커피를 끊어!
리첸: 아버지, 잔인한 말씀은 하지도 마셔요! 만약 제가 하루에 세번 커피를 못 마시게 된다면, 저는 고통속에서 구워진 염소고기처럼 시들어 갈 것이랍니다.

4. 아리아
리첸: 음! 이 커피는 너무나 달콤하구나. 천번의 키스보다 더 달콤하고 백포도주보다도 더 부드럽구나! 커피, 커피야 말로 내가 마셔야 할 것이고, 만약 누가 나에게 한 번 쏘고 싶으시다면, 아, 커피나 좀 따라 주세요!

5. 레시타티브
슐렌드리안: 만약 네가 커피를 끊지 않겠다면 나는 널 시집보내지 않을 것이고, 집에서 내 보내지도 않을 거야. 오! 언제야 내 말을 들을 거니? 커피를 끊어!
리첸: 오 좋아요! 커피만 주신다면요!
슐렌드리안: 이 말괄량이야. 유행하는 고래수염 치마도 못입게 하겠다.
리첸: 저는 그런 것은 참을 수 있어요.
슐렌드리안: 창가에 서서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못하게 할거야.
리첸: 그것도 괜찮아요. 하지만 제발 커피만은 마시게 해주세요.
슐렌드리안: 게다가 너는 모자의 금장식 은장식도 다 압수당하게 될 것야.
리첸: 좋아요, 좋아요! 제 기쁨만은 빼앗아 가지 마세요.
슐렌드리안: 이 말도 안 듣는 리첸, 결국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이구나!

6. 아리아
슐렌드리안: 고집센 딸들은 쉽게 말을 듣지 않지. 그러나 걔들의 약점을 알면, 아! 그러면 말을 듣게 할 수 있지.

7. 레시타티브
슐렌드리안: 자 이제 아버지가 하는 말을 주의깊게 들어라!
리첸: 커피만 말고는 뭐든지 다요.
슐렌드리안: 그래 그럼, 넌 절대로 남편을 가지지 못할 것이야.
리첸: 오 아버지, 남편이라니!
슐렌드리안: 맹세컨데, 절대 남편은 없을 거야.
리첸: 제가 커피를 끊을 때까지는요? 지금부터 커피는 만지지도 않을께요! 아버지, 들어 보세요, 저는 아무 것도 마시지 않을 거에요.
슐렌드리안: 그럼 넌 신랑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야!

8. 아리아
리첸: 사랑하는 아버지, 오늘 당장 신랑을 보게 해주세요! 오, 남편이라니! 정말, 이건 멋진 일이야! 만약 오늘 잠자리에 들기 전에 곧 그렇게 된다면, 커피 대신에 난 훌륭한 신랑을 얻을 수 있다면!

9. 레시타티브
나레이터: 슐렌드리안은 딸 리첸을 위해 신랑을 즉시 찾을 수 있는 지 알아 보러 나가는 군요. 그러나 리첸은 그녀가 원할 때는 언제나 커피를 마시게 하도록 하는 약속을 몰래 결혼 계약서에 쓰게 하지 않고서는 어떤 남자도 구혼에 성공하지 못하게 할 것이랍니다.

10. 트리오
고양이는 쥐 잡는 일을 그만둘 수가 없고, 처녀들은 커피를 마시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엄마도 커피를 마신답니다. 할머니도 그랬구요. 누가 그 딸을 혼낼 수 있겠어요?


위에 삽입된 곡은 Hogwood와 AAM, 그리고 Kirkby, Covey-Crump, Thomas의 연주. 아래는 앨범 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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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Amadeus, 1993

영화 Amadeus, 1984



그릇된 해석들

아마데우스는 지난 230년 동안 계속되어온 모차르트에 대한 환상을 이용하려고 했던 최근의 몇 가지 시도들 중 하나이다. 최근 많이 읽혀지는 두 권의 책들도 역시 모차르트의 일대기와 정신를 멋대로 해석하고 있다. 볼프강 힐데샤이머 (Wolfgang Hildesheimer)의 '모차르트'와 프란시스 카 (Francis Carr)의 '모차르트와 콘스탄테'가 그것이다. 힐데샤이머는 서신들을 자세히 독해하여 많은 통찰력있는 견해를 제공하고는 있으나, 모차르트의 사랑과 삶 그리고 그가 살고 있는 세계와의 감정적인 분리에 대한 추측은 그다지 근거가 없다. 그는 모차르트의 표현이 인위적이고 무감각하다고 보았고 주어진 상황에 대한 오늘날의 반응방식으로 모차르트를 왜곡되게 평가하고 있다. 최근의 연구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오래된 픽션 중 몇몇을 사용하고 그 자신이 만들어 내기도 했다. 아마데우스처럼, 그의 모차르트는 환상적인 캐릭터이고 작품은 날카로운 통찰력과 더불어 그릇된 해석들을 포함하고 있다.

또다른 음악애호가이며 전기작가인 프란시스 카도 역시 서류들을 검토하고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의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역사적 진실을 찾으려는 인상을 준다. 카는 독살설을 다시 제기하는데, 그는 살리에리가 아니라, 모차르트가 프란츠 호프데멜(Franz Hofdemel)의 아내이고 그의 피아노 학생 중 하나였던 막달레나와 가졌던 관계 (카에 의하여 꾸며내어진) 때문에 호프데멜을 의심한다. 호프데멜은 모차르트의 사망 며칠 후에그의 아내를 상해하고 본인은 자살했다. 호프데멜의 슬픈 운명이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모차르트와의 또 다른 연관관계는 그가 프리메이슨 형제였고 작곡가에게 돈을 빌려줬었다는 것 밖엔 없다. 반면에, 모차르트의 죽음과 호프데멜의 자살이 같은 시간 대와 공간에 있었다는 것은 단지 우연이다. 카의 책은 서류들에 기반을 둔 것처럼 보이는 타블로이드 (선정적인) 전기에 지나지 않는다.

힐데샤이머와 카의 책들 뿐만 아니라 연극, 영화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가지고 있는 의심할 수 없는 환상으로부터 성공을 이루어 냈다. 모차르트의 이름이 없었다면, 우리 자신의 문화가 만들어 낸 이런 인위적인 이야기들에 대한 깊은 관심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스스로 해석하기 위하여 편지, 회상, 그리고 다른 직접적인 자료들을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런 자료들을 쉽게 구하여 질 수 있으나, 편지나 회상의 작성자들 그리고 소문을 퍼뜨렸던 사람들 거의 모두가 각각의 의도와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단지 사실들"로 받아들여질 수는 없다. 모차르트의 신화가 번성하는 것은 바로 서류 자체들과 그것들에 대한 해석에서 부터인 것이다.

왜 모차르트는 이토록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가? 아마 그것은 그 음악 뒤에 있는 사람을 이해하고자 하는 영원히 잘못된 시도들로부터 나오게 된 것일 것이다. 모차르트의 음악이 종종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되곤 하지만, 그 본질적인 의미는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다. 예를 들어, 교향곡 40번 g단조 K.550에 대한 비평은 찬사로 일관되어 있지만, 그 성격은 파악하기 어려운 채로 남아있다.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은 그 곡이 엄격한 의미에서 고전파 양식이고 그리스식의 "가벼움과 우아함"으로 가득 차 있다고 보았다. 알프레드 아인슈타인(Alfred Einstein)은 그 곡이"실내악의 숙명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젠스 피터 랄센(Jens Peter Larsen)은 그 곡은 사적인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고 믿었다. 로빈스 랜던(Robbins Landon)은 그 곡이 모차르트의 조울증적 경향의 악화를 보여주는 일련의 작품 중 하나라고 말한 반면에, 잭 웨스트럽(Jack Westrup)은 오페라 부파의 정신을 그 곡에서 발견했다. 아마도 어떠한 교향적 캐논 작품도 학식있는 비평가들로 부터 이렇게 다양한 정서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의 음악에 대한 이러한 다양한 반응이야 말로 이 사람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설명해 주는 것일 것이다. 아마도 이런 의미에서 이 사람을 설명하는 전기들이 그의 음악에 대한 반응들과 비교할 만한 것이다. 역사 기록을 올바로 세우려고 시도할 수는 있겠지만, 샤퍼와 포먼의 살리에리는 어떤 면에서 보면 이미 옳다: 모차르트라는 천재는 설명을 초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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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eter Brown 은 인디애나대 음대에서 가르치고 있다. 그는 "요세프 하이든의 건반음악: 원전과 스타일" 그리고 "하이든 '창조'의 연주"의 저자이다. 브라운판의 "창조"는 크리스토퍼 호그우드와 the Academy of Ancient Music에 의하여 레코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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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Amadeus" and Mozart: Setting the Record Straight By A. Peter Brown
Reprinted from The American Scholar, Volume 61, Number 1, Winter 1992.

번역에 쓰인 글:
© 1992 by the author. By permission of the publisher.
Steve Boerner
steve@mozartproject.org
Revised November 22, 2001
출처:
http://www.mozartproject.org/essays/brow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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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고 순수한 모차르트"

연극과 영화 둘 다에서의 중심적인 문제는 모차르트의 행동인데, 그가 귀족저택의 응접실에서 콘스탄체와 시시덕거리는 것, 부적절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 과도하게 술을 마시고, 황제와 대주교에게 버릇없는 태도를 보이는 것, 살리에리를 흉내내며 놀리는 것, 잘난 척을 하고, 계속 예의범절을 무시하는 것 등이다. 만일 잘츠부르크 대주교와 황제 앞에서 그런 행동을 보였다면 모차르트는 궁정에서 추방당하거나 그보다 더 심한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민중의" 황제가 다스리던 시절에 격식이 느슨해 졌기는 하지만, 요세프2세에게 그가 말했던 것 처럼 "바보같다"고 말하는 것은 거의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그랬다면) 결과적으로 빈 오페라의 어떤 작품도 의뢰되거나 작곡될 수 없었을 것이며, 그의 어떤 작품도 공연될 공간이 주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확실히 모차르트는 황제나 그의 측근들을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 대접해야만 했었을 것이다.

모차르트의 음주 장면은 아마데우스에서 부주제로 계속 등장한다. 그러나 마지막 1-2년간 음주량이 늘긴 했었지만, 사실 그가 과도하게 음주한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콘스탄체가 바덴에 있었던 1791년 여름에, "그는 쉬카네더 (Schikaneder)와 함께 아침 내내 샴페인을 마시곤 했고 밤새도록 펀치를 마셨다." 그러나 이런 기록은 그를 직접적으로 알 지 못했던 이그나츠 페르디난드 칼 아놀드(Ignaz Ernst Ferdinand Karl Arnold)로부터 온 것이다. 술마시기 좋아하는 작가들이 많은 반면, 작곡가들의 경우에는 그런 상황이 많지 않은 것 같다. 그의 위대한 음악이 알콜의 영향 하에서 작곡되었을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토록 일관성있게 많은 작품들에서 그렇게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데우스는 또한 모차르트의 혼외관계 문제도 제기한다. 그 장면은 후궁으로의 탈출의 초연 후에 나온다. 콘스탄체 베버는 모차르트의 약혼녀로 황제에게 소개된다. 그 때, 프리마돈나이며 사실 살리에리의 연인인 카발리에리 (Cavalierri)는 모차르트에게 한 방 날린다. 살리에리는 숨을 죽이며 "모차르트가 그녀를 가졌군."이라고 답한다. 콘스탄체를 제외한 모차르트의 관계에 대하여는 단지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다. 몇몇 전기작가들은 모차르트가 거의 모든 그의 건반악기 제자들, 프리마돈나들 그리고 그가 일련의 저급한 편지들을 보냈었던 사촌 "Bäsle"(역주: 사촌동생을 뜻하는 슈바벤 지방 애칭)과 사랑에 빠졌었다고 말한다. 모차르트가 연애에 빠져 있었는지, 모든 여인들과 성적인 관계를 가졌었는지 아닌지는 어느 한 가지 방향으로  증명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그가 그러했다면, 모차르트와 관계한 여인의 목록은 돈지오반니의 목록에 비견될만 할 것이다. 그러나, 신중하고 제한적인 견해를 보여 주는 두 장의 편지가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첫번째는 보헤미아 작곡가인 요세프 미슬리베체크(Joseph Mysliwecek)의 매독에 관한 것인데, 그의 코에는 궤양이 생겨서 거의 없어질 것 같은 지경이었다. 모차르트는 직접 그의 얼굴을 보았고 그런 변형이 생긴 원인을 잘 알고 있었으며 아버지에게 이렇게 썼다: "그런 끔찍한 모습을 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불쌍한 소녀를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매력적인 단어인 애인(maitresse)은 우리의 혀 위에서는 (wh--e in our tongue) 정말 지나치게 매력적이군요. 그러나 저는 브루네티(Brunetti)도 미슬리베체크(Mysliwechek)도 아닙니다. 저는 모차르트, 젊고 순수한 모차르트입니다."

1781년 12월에 그는 다시 이렇게 썼다: "그러므로 저는 끝맺기 전에 제가 상당히 논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유들을 말씀 드려야만 합니다. 자연의 음성은 저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 만큼, 그리고 아마 많은 크고 힘쎈 시골뜨기 친구들에게 보다도 더 크게 들립니다. 저는 단지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요즈음 하는 것처럼은 살 수가 없을 뿐입니다. 첫째로, 저는 그러기엔 너무나 종교적이고, 둘째, 저의 이웃을 너무도 사랑하며 순진한 소녀를 유혹하기에는 너무나 명예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째로, 저는 병에 걸리는 것이 너무나 두렵고 구역질 나며 끔찍하고 공포스럽고, 그런 창녀들과 놀아 나는 바보짓을 하기에는 건강을 너무나 염려하고 있습니다."
 
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그런 척하는 태도를 취했을 가능성도 확실히 있는데, 그는 파리여행 중이나 그 후에 그리고 1777-78년에도 가끔 그랬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슬리베체크와의 만남은 방탕한 생활의 위험성에 관하여 깊은 인상을 남겼슴에 틀림이 없고, 특히 자신의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인정되지 못한, 이해되지 않은

몇몇 사후의 조사 (또는 검시결과)에 따르면, 모차르트의 마지막 몇 년간의 생활방식이 그가 사망을 앞당겼다고 생각되며 - 비록 원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 이러한 결론은 아마데우스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역시 인용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독살설이 더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였다. 의학적으로 그리고 단순한 관찰로서 모차르트가 최후에 앓았던 병을 진단하려는 시도들에서는 독이 아니라 티푸스에서 류마티즘 열병에 이르는 다양한 원인들을 지목했다. 피터 데이비스 박사 (Dr. Peter J. Davies)가 했던, 가장 철저했던 조사에서는 모차르트가 11월 18일에 있었던 프리메이슨 지부 집회에서 연쇄상 구균에 감염 (streptococcal infection)되어 발생한 알레르기성 자반증(Schonlein-Henoch syndrome)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200년이 지난 후의 진단이므로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독살설이 없었다면 죽음의 원인에 대해 이토록 의견이 분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차르트 최후의 병명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무엇이 성년의 모차르트를 작곡하게 했는가에 관한 데이비스 박사의 결론이다. 왜 그리고 어떻게 그는 어떤 시기에는 너무나 많은 작곡을 했으며, 다른 시기에는 거의 하지 않았는가? 데이비스 박사는 모차르트가, 정신병은 아니지만, 주기적으로 기분이 상승했다가 침체하곤 하는 정서불안증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믿는다. 그는 "예술가들은 창조적인 활동을 놀랍도록 폭발시키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모차르트는 극단적인 예이다."라고 지적한다. 1770년대 후반부터, 데이비스 박사는 다섯 번의 그 같은 폭발을 찾아 낸다: (1) 만하임, 1777-1778년; (2) 뮌헨, 1780-81년; (3) 빈, 1786년 전반; (4) 빈, 1788년 여름; (5) 빈, 1791년 1분기. 예를 들어, 데이비스가 말한 세번째 폭발에서, 모차르트는 피가로의 결혼, 극장지배인,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 K.488과 491, 피아노 사중주 K.493, 혼협주곡 K.495, 그리고 몇 개의 작은 작품들을 마무리 짓는다. 그러나, 밖으로 드러나는 생산성의 시기들 (즉, 작품이 완성된 시기)만 보고 내부적인 준비작업의 시기들이 없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피가로 같은 작품의 초연 시의 흥분한 모차르트는, 데이비스에 따르면, 궤도를 좀 벗어나는 것 같았을 것이다. 데이비스는 또한 "존경받는 사랑의 객체로부터의 정기적인 사랑의 공급"을 필요로 하는 나르시즘적인 의존성도 찾아냈다. 이런 심리적인 요소와 프리랜서 음악가로서 일반적으로 직면했을 불안정함의 결합을 모차르트는 때때로 잘 극복해 내기 어려웠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를 진가가 인정되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이해되지도 못하며, 재정적으로 힘들어 동전 몇 푼만 남은 가난한 천재로 19세기 방식으로 그려낸다. 그러나, 샤퍼와 포먼의 영화 버전에서, 그는 1781년 이후 내내 빈 중심의 호화로운 아파트에 살고 있다. 사실, 모차르트는 자주 거주지를 바꾸었고 그의 수입은,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음악가로는 특이하게 높았으며, 몇 년간은 전 빈 시민들 중 상위 10%에 속했었다. 또한, 모차르트는 그 시대의 기준으로는 결코 가난하지 않았다. 가난한 작곡가라는 개념은 그가 그의 프리메이슨 형제인 미카엘 펀치버그(Michael Puchberg)에게 1788년에 1791년에 돈을 빌리려는 목적으로 쓴 일련의 편지로 부터 나온 것이다. 예를 들어, 1789년 7월12일에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친애하는, 가장 사랑하는 친구이며 가장 존경하는 B.O. 에게

위대한 신이시여! 저는 제가 가장 싫어하는 적이라고 지금 저의 상황에 놓이게 하고 싶지 않군요. 가장 사랑하는 친구이며 형제인 당신이 저를 버린다면, 불행하고 결백한 저 자신과 불쌍한 병든 제 아내와 아이는 모두 갈 곳이 없게 됩니다. 지난번 당신을 만났을 때 저는 제 사정을 터놓고 이야기 하고 싶었습니다만, 그럴만한 용기가 없었지요 - 사실 지금도 그럴 용기가 생기지 않네요. 그래서 간신히 글로 쓰고 있을 뿐이고 쓰면서도 떨고 있습니다 - 그리고 당신이 저를, 제 상황을 아시고 있고, 저의 불행과 최악의 비참한 상황에 관하여 저의 결백함을 믿고 계시다는 것을 제가 확신하고 있지 않다면 감히 편지를 써서도 안되지요. 자비로운 신이시여! 저는 당신께 감사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애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 빚을 갚는 것 보다 더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다른 자료들은 없지만 이러한 편지들로부터, 모차르트가 빈에서 환영받지 못했었다고 결론 지어진 것이다.

한 가지 이유가 아니라, 여러가지 요소들이 그의 재정적인 상황을 악화시켰다. 모차르트는 5군데에서 수입을 얻었었다: 피아니스트로서 공공 또는 사적인 연주, 정기공연, 교습, 수수료, 그리고 음악의 출판. 이러한 것들은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경제사정이나 관련된 요소들에 의하여 영향을 많이 받았다. 1780년대 종반에 오스트리아는 터키 전쟁에 참가하고 있었고 많은 모차르트의 후원자들은 군복무를 하거나 빈에 거주하고 있지 않았었다. 심지어 황제도 1788년에 전쟁터로 나갔다. 콘스탄체는 병들어 바덴으로 요양을 떠나야만 했다. 한 때는 그녀의 발목 궤양이 매우 심해졌었다. 온천욕을 통한 치료는 부유층들만이 사용했는데 비용이 많이 들었슴에 틀림없다. 1780년대 후반 동안 모차르트는 여러가지 활동으로 수입을 벌기보다는 작곡활동을 함으로써 수입을 일정하게 가져 가려고 노력을 했었다. 일반적인 경제상황 뿐 아니라 그들 가족의 특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 가족은 예전 습관대로 생활을 유지하였고 그것이 현금상태에 문제를 야기시켰다. 상황은 그들이 1780년대 초반의 6-7년간 높은 수입을 벌어들였을 때 저축을 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그리고 1791년에 모차르트가 칼 리흐노프스키 왕자 (Prince Karl Lichnowsky)가 제기한 소송에서 패소하여 상당한 돈을 내야 했기 때문에 더 악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가 살아있었다면, 그의 수입은 하이든이 1790년대에 벌어들인 상당한 수입을 능가하거나 비슷했을 것이다.

모차르트 학자인 크레머 (Uwe Kramer)는 1780년대 초 높은 수입과 비용의 불균형이 있었을 텐데 모차르트의 현금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에 관하여 의문을 제기했다. 크레머는 많은 현금이 당구나 카드게임을 하여 도박자금으로 날아가 버렸다고 결론지었다. 이런 이론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에서 부터 이런 이론이 어느정도 가능성은 있다는 수용적인 의견까지 혼합된 반응이 있었다. 증명이 될 수 있건 없건, 모차르트의 생활 습관에 대한 몇몇 증언은 도박을 했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 피터 데이비스(Peter J. Davies)는 모차르트의 성격적인 특징이 그의 환경적인 요인과 결합되어 그가 그런 강박적인 행동을 하는 경향을 만들어 내었을 수도 있다고 빋는다.

아마데우스에서는 모차르트의 마지막 나날들과 매장 장면을 상상과 믿을 만하지 못한 전통을 결합하여 보여준다. 상상력은 모차르트의 마지막 나날들에 대한 샤퍼와 포먼의 영화 버전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살리에리가 1791년 10월 13일 마술피리 공연에 참석했던 것이 12월 5일 모차르트의 죽음과 시간적으로 가깝게 묘사되어 있다. 샤퍼의 버전에서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짧은 마지막 투병기간에 레퀴엠을 작곡하는 것을 돕는다. 사실, 모차르트의 미망인은 적어도 세명의 작곡가들에게 모차르트 최후의 작품을 돕도록 부탁했었고 마침내 프란츠 크사버 쥐스마이어(Franz Xaver Süssmayr)가 조수로 일하게 되었으며, 모차르트는 단지 몇 시간이 아니라 3주 동안이나 투병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를 정성껏 돌본 것은 콘스탄체와 그녀의 가족들이었는데, 그의 아버지나 누이는 이 점을 전혀 인정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아이러니다. 모차르트의 장례식과 매장은 고트프리트 반 스비에텐(Gottfried van Swieten) 남작에 의하여 준비되었고 그는 요세프식의 매장 지침을 따랐으며 망자의 재정적인 상황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아마데우스는 매장에 대하여는 꽤 정확한 그림을 보여준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사망자를 자루에 넣어 공동묘지에 던져넣는 것은 극단적으로 모욕적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1791년에는 빈 인구의 약 85%가 이런 방식으로 매장되었다는 점이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단지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던 매장방식이 아니라 일반적인 규범이었다.


(6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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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Amadeus" and Mozart: Setting the Record Straight By A. Peter Brown
Reprinted from The American Scholar, Volume 61, Number 1, Winter 1992.

번역에 쓰인 글:
© 1992 by the author. By permission of the publisher.
Steve Boerner
steve@mozartproject.org
Revised November 22, 2001
출처:
http://www.mozartproject.org/essays/brow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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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도 저를 사랑합니다"

만약 레오폴드가 볼프강의 세계에서 "하느님 다음"이었다면, 그의 아내 콘스탄체는 같은 별자리의 어디 쯤에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녀는 아마데우스에서 잘 보여진 것처럼, 모차르트가 자신의 독립성을 보여주고 강화할 수 있는 메카니즘이었다. 이런 점에서, 강박적 외설어증, 분변기호증, 그리고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비엔나 저택에서 음악수업과 리셉션 직전 장면에 성적인 등장 부분을 넣는 등,  그녀를 볼프강의 유치한 말장난을 같이하는 "머리가 빈" 사람으로 묘사한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역시 샤퍼와 포먼의 목적에 맞게 시간의 흐름이 바뀌어져 있다. 그는 대주교를 알현하는 것을 끝낼 때까지는 콘스탄체와 같이 까불고 놀고 있었을 수가 없었을 것이고 더군다나 살리에리가 지켜보고 있는 중에는 그럴 수가 없었을 것이다. 모차르트는 그의 아버지에게 영화와는 다른 순서로 일이 벌어졌음을 설명한다: "제가 한 가지 더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는데, 그건 제가 대주교 밑에서 하던 일을 그만두고 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건 제가 그녀의 집에서 머물렀을 때 받은 부드러운 배려와 관심에서 시작된 것이지요."

결국, 우리는 콘스탄체에 대하여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그녀의 성격에 대한 부정적인 면들은 아마도 레오폴드와 모차르트의 누이인 난넬로부터 나온 것일 것이다. 미망인으로서의 콘스탄체의 모습을 보면, 그녀는 상당한 정도로 음악적인, 그리고 사업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슴에 틀림없다. 그녀는 죽은 남편과 그녀 자신의 명성을 위하여 많은 일을 했다. 페미니스트 시대 이전의 문헌에서는 그녀가 남편의 천재성 덕에 부를 누리지도 못했고 그 천재를 이해하지도 못했다고 쓰여져 있으나 이것은 분명히 공정한 평가는 아니다. 볼프강이 누구와 결혼을 했었어도 이런 비난은 퍼부어졌을 것이다. 아서 슈리그 (Arthur Schurig)는 그녀에 관한 유일한 책에서 그녀가 "인색하고, 속이 좁으며, 허영심이 많고, 탐욕스러우며, 미신적이고 수다럽다"고 말했다. 모차르트 가족의 서신들을 읽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모든 형용사들이 그녀의 시댁식구들에게도 적용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편견이 들어 있을 지라도, 콘스탄체를 가장 완벽하게 묘사하는 것은 바로 볼프강 그 자신의 설명이다. 그는 결혼 전에 그녀에 대하여 레오폴드를 설득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자꾸 말씀을 드려서 귀찮으시겠지만 제가 말씀을 마치기 전에, 아버지께서 콘스탄체의 성격을 더 잘 아셨으면 합니다. 그녀는 못생기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움이라고는 작고 검은 두 눈과 귀여운 모습 뿐이지요. 그녀는 위트가 있지도 않지만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완수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상식이 있어요. 그녀가 낭비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은 명백한 거짓말입니다. 반대로, 그녀의 어머니가 적으나마나 있는 것들을 다른 두 자식들에게 해주었고 콘스탄체에게는 해준 것이 없기 때문에, 그녀는 소박하게 옷을 입는데에 익숙해져 있어요. 사실 그녀는 깨끗하고 말쑥하게 옷을 입고 싶어하지만 화려하게 꾸미지는 않아요. 보통 여자들이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것을 그녀는 스스로 만들 수 있어요. 그리고 그녀는 머리도 매일 스스로 하지요. 더구나 그녀는 집안일을 어떻게 하는지 알고 있고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어요. 저는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도 온 마음을 다해 저를 사랑합니다. 제가 어떻게 이보다 더 나은 아내를 가질 수가 있겠어요?"

또한 샤퍼와 포먼은 콘스탄체가 장기 요양을 위하여 바덴에 머무르는 동안 모차르트에게 충실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점을 암시한다. 다른 곳에서도 그녀가 그 당시에 역시 바덴에 있었던, 모차르트의 제자이며 카피스트라고 알려진 프란츠 자버 쥐스마이어와 관계가 있었을 것이라고 나와 있다. 이 주장의 근거로 몇몇 작가들은 모차르트 사후에 그녀의 건강이 돌아와 이후 쭉 나빠지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그녀가 이후 다시는 임신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1791년 7월 26일에 태어난, 그들의 아들, 프란츠 자버 볼프강은 쥐스마이어의 아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었다. 이 가설은 프란츠 자버 볼프강이 그의 합법적인 아버지의 가장 독특한 유전적인 특징 - 기형적인 왼쪽 귀 - 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역시 이치에 맞지 않는다.
 
결국, 콘스탄체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지지하는 증거는 별로 없다. 비난은 주로 그녀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이나 남성적인 편견을 가진 음악학자 그룹으로부터 온다. 당연하게도, 콘스탄체가 가족 간의 편지를 조작했다는 점은 학자들을 혼란하게 만들었고 그녀의 동기에 대한 의심을 가중시켰다. 그러나, 그러한 의심은 어떤 사람의 일대기에 대하여 더 방어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이전 시대에 맞는 견해라기 보다는 오히려 20세기적인 관점에 해당하는 것이다. 아마 모차르트의 일생에서 콘스탄체는 그의 어머니인 안나 마리아 월버거 페틀과 가장 잘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녀에 대하여 잘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아는 한, 능력이나 성향의 양면에서, 그녀는 가장 확실한 비교대상이 될 것이다. 두 여인들은 상황에 맞게 행동했으나 눈에 띄지 않았었다.

평범한 기질, 시시한 농담들

아마데우스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묘사는 바로 볼프강 자신이다.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형상화했을까?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시대의 많은 작곡가들을 연구하는데에 있어서 문제점은 개인적인 자료가 부족하다는 점인데, 이에 반해 모차르트와 그의 가족들에 대해서는 일기, 광범위한 편지, 쪽지, 언론에서의 리뷰, 회상, 음악 목록와 압보의 서명 등을 포함하여 자료가 과다할 정도이다. 그러나, 알란 타이슨(Alan Tyson)은 그의 통찰력있는 글에서 이렇게 묻고 있다. "우리가 모차르트에 대하여 진실로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또는 우리가 그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많은 자료들이 음악천재의 마음을 우리에게 열어 보여  줄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의 전기가 그의 음악을 설명할 수 있는가? 또 음악가의 인간됨과 그의 예술성 사이에는 관계가 없는가? 마지막 질문에 대하여, 샤퍼는 철저히 "아니오"라고 대답한다. 샤퍼의 볼프강은, 살리에리의 말을 빌면, "낄낄 웃어 대는 음탕한 놈"이다. 그리고 샤퍼의 살리에리가 "기적같은" 천재과 "숭고한" 음악에 관하여 번민할 때, 음악가와 그의 음악 간의 괴리는 깊어 진다. 그러므로, 아마데우스에서 암시되어진 중심적인 질문은, 모차르트의 성격과 그의 예술적인 작품들이 관계가 있는가? 라는 것이다.  

그러한 질문은 역시 18세기가 아닌 19세기에나 나오는 것이다. 모차르트의 시대에는 작곡가로서의 조건은 천재가 되어야 하는 것도, 독창적인 예술적 견해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재능의 문제이며 (음악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 맞는 새로운 음악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당시에는) 표현의 종류에 따라 디자인되어지고 사용되어 지는, 음악적 아이디어가 들어있는 사전이 존재했다. 작곡가는 이들 중에서 골라서 청중들이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을 생산했다. 모차르트는 새로운 깊이있는 표현을 창조하기 위하여 이런 음악적 어휘들을 기술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조작할 수 있었다. 모차르트가 이렇게 활동했었던 것은 18세기 종반에 주로 유행하던 형식의 범위 내에서였다. 그러므로, 그 사람과 그의 음악이 일치하지 않는 다는 것이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비더마이어(Biedermeier)식의 여류작가인 캐롤린 피츨러 (Karoline Pichler)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모차르트와 하이든은 내가 잘 아는데, 개인적인 교류에서 범상치 않은 지적능력을 보여 준 적이 전혀 없고 지적인 문화의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었으며, 어떤 학식이나 고급스러운 흥미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기질적으로 좀 평범하고, 시시한 농담들을 하고, 모차르트의 경우엔, 생활에 책임감도 없었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깊이가, 환상의 세계가, 화음이, 멜로디가 그리고 감정이 이 가망없는 외양 뒤에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아마데우스의 살리에리는 악보에 고친 흔적이 없는 모차르트의 자필악보를 보자, "기적이야"라고 말했다. 이런 묘사도 역시 올바른 것이 아니다. 그 당시의 다른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모차르트는 비범한 속도로 곡을 써나가는 재능이 있었지만, 잘못 시작된 부분과 1-2년에 걸쳐서 작곡이 진행 중이었던 곡들이 꽤 많이 있었다. 몇몇의 작곡 스케치가 전해져 오고 있는데 이런 스케치들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것들 보다 원래는 더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이든에게 헌정되어진 6개의 사중주에 관하여, 모차르트는 출판된 악보에 부친 편지에서, "사실 이 곡들은 길고 고생스러웠던 작업의 결과이다."라고 인정하고 있다. 샤퍼의 볼프강이 시카네더 (Schikaneder)에게 마술피리가 그의 "국수 (역주: 머리)"에 들어 있고 단지 적어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절반도 진실이 아니다. 확실히, 곡의 개념과 작곡의 상당부분은 이미 형성되어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음표들을 종이에 적는 행동은 분명히 변화를 야기한다. 오페라의 경우에는, 리허설이 시작되고 나면, 드라마와 배역들을 위하여 온갖 종류의 수정이 일어나곤 하는 것이다.

샤퍼가 아마데우스에서 보여준 18세가 오페라에 대한 생각은 몇몇의 경우에서는 정확하지만, 다른 경우에는 역사적 사실을 잘못 전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오페라를 만드는 것은 주제의 선정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시인이 고용되어 가사를 만들고 마지막으로 작곡가가 선임되어 이미 선정된 가수들에 맞게 아리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미 완성된 오페라를 궁정에서 연주하는 것은 정확한 절차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아마데우스에서 궁정 오페라의 감독인 프란츠 자버 오르시니-로젠버그 (Franz Xaver Orsini-Rosenberg)는, 모차르트가 주제넘게도 이미 무대에 올리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던 대본 - 이 경우에는 피가로 - 을 선택한 것을 놀라워 하는데 이는 정상적인 관례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다.

아마데우스는 또한 후궁으로부터의 탈출이 터키식이고 하렘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매우 특별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런 배경은 특이한 것이 아니었고, 사실 모차르트는 이전에도 자이데(Zaide)로 알려진 작품에서 비슷한 장소를 선정하여 작업한 적이 있다. 모차르트가 피가로의 결혼을 오페라로 만들려고 했을 때, 그는 오페라 부파라는 장르를 오페라 세리아와 반대되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마치 오페라 부파가 요세프 2세와 빈 사람들에게 전혀 친숙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었다. 이것도 역시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오페라 부파는 비인의 극장들에서 매우 성공적으로 상연되었었다. 그가 "헤라클레스" (오페라 세리아에서 등장인물의 전형)의 엄격함을 "이발사" (즉, 피가로)의 코믹한 가벼움에 비교할 때, 그는 "이발사"가 훨씬 더 호소력이 있음을 깨닫는다. 이것은 파이지엘로(Paisiello)의 세빌리아의 이발사가 성공한 이후로 이미 빈의 청중들에게 인지되어 있는 사실이었는데, 피가로의 결혼은 그 속편이었다. 오페라 세리아는 1780년대에 죽은 장르로 알려져 있다. 모차르트의 입에서 나오는 말처럼 하자면, 그것은 "대리석 똥"이었다.

오페라 세리아에 관한 그러한 생각은, 새로운 장르인 오페라 부파의 첫번째 독일인 대가로서 모차르트의 역사적 위상을 높이려는 독일의 음악학자들에 쓸데없는 시도에 의하여 생겨났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 티토왕의 자비 역시 오페라 세리아 였다. 티토왕의 자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작곡가들인 마이어, 로시니, 도니제티, 벨리니 그리고 베르디에 의하여 대표되는 이 장르의 후대 작곡가들의 대중적인 인기가 증명하듯이 오페라 세리아는 19세기까지 계속 살아 숨쉬고 있었다.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는 황제에게 피가로의 위대한 피날레에 대하여, 길이와, 레시타티브가 없는 점, 이중창에서 전체 배역으로 확장되는 점을 지적하며 이것이 새로운 아이디어인 것처럼 설명한다. 사실, 이것은 작사가인 로렌조 다 폰테 (Lorenzo da Ponte)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나, 다 폰테는 청중들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이렇게 쓴 것이며 이런 설정의 드라마틱한 생동감과는 관계없이 그것은 그렇게 되어야만 했었다. 심지어 피가로에 대한 관객의 반응도 영화의 의도를 위하여 바뀌어 졌는데, 아마데우스에서는 이것을 실패로 그렸다. 사실은, 황제는 이미 길어진 오페라의 공연이 결말없이 계속 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앙콜을 금지시켜야만 할 지경이었다. 

마지막으로, 오페라 공연이 진행되는 방법 자체에 대하여도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와 모차르트는 둘 다 오늘날 청중들이 익숙해져 있는 방법으로 오페라를 지휘했다. 그것은 18세기의 사실에는 맞지 않는다. 지휘의 책임은 오케스트라를 책임지고 있는 악장과, 성악부분을 책임지고 있으며 오케스트라 음악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건반악기 연주자로 양분되어 있었다. 오페라의 첫 몇 번 정도의 공연에는 작곡가가 하프시코드나 포르테피아노를 연주하면서 가수들을 향해 약간씩 제스쳐를 써가면서 지시를 하기도 했다.

(5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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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Amadeus" and Mozart: Setting the Record Straight By A. Peter Brown
Reprinted from The American Scholar, Volume 61, Number 1, Winter 1992.

번역에 쓰인 글:
© 1992 by the author. By permission of the publisher.
Steve Boerner steve@mozartproject.org
Revised November 22, 2001
출처: http://www.mozartproject.org/essays/brow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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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면적인 관계

대조적으로 레오폴드 모차르트는 - 살리에리, 볼프강, 그리고 콘스탄체와 함께 - 샤퍼의 4명의 주요 등장인물들 중의 하나이다. 기사장으로 비유된 것은 이름의 표면적인 의미에 근거한 것이고, 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죽은 돈지오반니에서의 등장인물과는 큰 상관은 없다. 레오폴드는 아들을 보호하려고 했었지만, 참견꾼, 가혹한 심판관이었다. 샤퍼는 레오폴드가 비엔나에 예상치 않은 방문을 하는 것으로 극에 등장 시키는데 이는 그가 콘스탄체를 처음 만났던 실제 상황과는 다르다. 그 커플은 사실 1783년 말에 잘츠부르크로 여행을 가서 가족들을 만났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방문은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사실 아마데우스에서는 1783년 잘츠부르크 방문에서의 분위기를 1785년에 있었던 레오폴드의 비엔나 방문과 1780년대 후반의 모차르트의 재정적인 어려움과 연결시켰다. 레오폴드가 비엔나의 아파트에 들어오는 장면과, 그가 전날 밤에 먹고 마셨던 와인잔과 접시들이 널려 있는 것과 콘스탄체는 아직 잠자리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심문하는 듯한 질문들- 하녀는 없느냐, 경제적인 상황은 어떠하니, 네가 빚이 있다고 하더라, 학생은 받고 있느냐, 그리고 콘스탄체에게는, 임신을 하고 있느냐 - 을 던지는 것은, 18세기 비엔나의 성공적인 프리랜서 음악가의 생활에 대한 것이 라기 보다는 현대적인 사고방식을 더 많이 보여 주고 있다. 만약 그 질문들이 실제가 아니라면, 그것이 20세기의 남성, 여성들에게 레오폴드에 대하여 전달하는 메시지는 매우 분명한 것이다. 아마데우스에 나오는 그의 성격은 레오폴드가 비엔나의 폰 발트슈타텐 남작 (Baroness von Waldstadten)에게 보낸 편지에 근거하고 있슴은 확실하다. "어린 시절에 나는 철학자들은 말이 없고 잘 웃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세상을 향해 언짢은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내 경험으로, 나 스스로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나는 틀림없이 철학자로 보일 것이다."

(영화와는) 반대로, 레오폴드가 1785년 2월11일에서 4월25일까지 아들을 실제로 방문했을 때, 볼프강은 매우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고 재정적으로도 풍족했다. 레오폴드가 방문했던 기간에, 모차르트는 6회의 예약제연주회를 가졌었고 (2월 11, 18, 25일, 3월 4, 11, 18일), 요세프 하이든은 2월 12일에 볼프강이 그에게 헌정한 6개의 사중주곡의 첫 3곡을 보기 위하여 방문하여 레오폴드에게 그의 아들이 그가 알고 있는 작곡가 중에서 최고의 작곡가라고 이야기 하였다. 2월 13일에 모차르트는 피아노 협주곡 K.456을 부르크극장 (Burgtheater)에서 연주하였고, 2월 15일에는 다른 협주곡 K.466을 같은 장소에서 연주했으며, 21일에는 지키 (Zichy)백작을 위하여 연주하였다. 3월 10일에는 부르크극장에서 다른 협주곡을 연주하였고, 13일과 15일에는 음악가협회(Tonkünstler Societät)가 모차르트의 오라토리오 '다윗의 회개 (Davide Penitente)'를 부르크극장에서 공연하였다. 3월 20일에 모차르트는 아마 안나 스토라체의 연주회에 갔었을 것이며, 4월 2일에는 6개의 "하이든" 사중주 모두를 베츨라 폰 플랑켄스턴의 저택에서 연주했다. 4월 24일에는 프리메이슨 칸타타 K.471이 "Zur Eintracht"의 별장에서 울려퍼졌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아버지에게는 흥분되는 것들이었다. 1760년대와 70년대 그 가족들의 여행도 이러한 활동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 모차르트가 이 시기에 벌어들인 돈은 레오폴드의 연봉의 몇 배나 되었다. 그의 아버지의 반응은 노련한 음악가답게 별로 특색이 없었다. "우리는 1시 전에는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9시 전에 일어나지 않는단다. 2시나 2시 반 경에 점심을 먹지. 날씨는 좋지 않아. 매일 같이 연주회가 있고, 나머지 시간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작곡을 하면서 보낸단다. 나는 여기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생각이 좀 든단다. 연주회들이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이런 야단법석을 다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내가 도착한 이후로, 네 동생의 포르테피아노는 열두 번도 더 극장이나 다른 사람의 집으로 옮겨졌었단다. 피아노 밑에는 큰 페달이 있는데 2피트나 되고 엄청나게 무겁단다. 그것이 멜그루브로 매주 금요일마다 옮겨졌다가 또 지키 (Zichy) 백작댁으로, 카우니츠 (Kaunitz) 왕자댁으로 옮겨지곤 한단다."

레오폴드가 비엔나에서 떠난 이후로, 그는 그의 아들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와의 관계는 아마데우스가 보여주는 것보다 더 양면적인 것이었다. 볼프강의 부모에 대한 시각은 3가지의, 매우 다르고 상충되는 것들이었다. 그의 어린시절의 아버지는 그의 아들을 "신이 내린 기적"으로 여겼었고 아들의 음악교육 (바이올린, 건반, 작곡)을 비롯한 교육에 헌신했었다. 레오폴드는 그에게 단지 아버지가 되어준 것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그를 교육시켰다. 이러한 어린 시절은 볼프강이 아버지를 가장 좋아하도록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볼프강은 유순한 아이였고 레오폴드는 항상 그를 콘트롤하면서 파리, 런던, 비엔나에 두번, 이탈리아에 세번 여행을 가도록 했었다.

볼프강이 20대 초반이었을 때, 이러한 관계는 두 가지 방향에서 영향을 받게 되었다. 레오폴드는 그의 거주지를 대주교가 제한했었기 때문에 더이상 아들과의 긴 여행을 위하여 잘츠부르크를 떠날 수 없었고, 볼프강은 이제 더 이상 말 잘 듣는 아이가 아니었으며 자기 고집이 있는 어른이 되었다. 만약 레오폴드가 같이 있지 않았다면, 볼프강은 아마 그렇게 잘 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레오폴드는 좀처럼 아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볼프강이 파리와 다른 지역에 있는 동안, 첩자가 그의 아들의 활동을 염탐하여 레오폴드에게 보고 했었다. 파리 여행의 목적은 볼프강의 직업을 찾는 일이었는데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여행은 볼프강이 여자에 약하다는 점과 돈을 잘 관리하지 못한다는 점을 밝혀냈다. 최고의 충격은 그의 어머니의 사망이었는데, 그 때 이후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결코 회복되지 못했다. 레오폴드는 볼프강이 어머니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했다.

부모님과 잘츠부르크로부터의 자유를 맛 본 이후로, 식구들의 영역을 떠나는 것이 볼프강의 가장 강한 소망이 되었다. 볼프강은 문자 그대로 대주교의 관할에서 문 밖으로 쫓겨남으로서 자유롭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레오폴드를 더욱 고립시켰는데, 그는 볼프강이 독립적으로 스스로 자기관리를 할 능력이 있다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볼프강이 잘츠부르크로 돌아오기를 바랬었다. 레오폴드는 비엔나의 대중들이 궁극적으로 볼프강의 음악을 싫증낼 것으로 생각했고, 볼프강은 그 자신을 관리할 능력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볼프강이 궁정의 직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자기 파멸의 징조로 여겼다.

더구나, 레오폴드 보다 더 모차르트를 잘츠부르크로부터 몰아 내었던 것은 대주교와 지역의 음악가 들이었다. 또한 이 도시는 오페라를 작곡하고 싶은 작곡가를 위한 공간도 부족했다. 마지막으로, 볼프강이 태어난 도시에 남아 있는 한 결코 벗어날 수가 없었던 신동이라는 굴레가 그곳에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작은 기적"으로 생각했고 1770년대 중반까지도 젊고 재능있는 음악가로 여기지 않았다. "하느님 다음은 아빠"였음에도 불구하고, 볼프강은 비엔나에서 자립했고, 콘스탄체와 결혼한 후에 완전한 독립을 향한 그의 투쟁은 결국 승리했다.

볼프강은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조율하는 것에는 확실히 레오폴드 만큼 유능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레오폴드의 관리스타일은 찌꺼기를 남겨서 볼프강이 일종의 직위를 얻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던 것 같다. 1769년에 이미 요한 아돌프 하쎄는 반기을 들었다. "그 모차르트 선생은 아주 예의바르고 세련된 분입니다 그리고 아이들도 매우 잘 교육받았지요. 아들은 더없이 잘생기고, 생기있고 우아하며 예의가 바릅니다. 그리고 그를 알면 알 수록 사랑스러워 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나는 만약 그가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제대로 발전을 한다면, 그는 신동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의 아버지가 아마 너무 그를 응석받이로 키우거나, 과도한 칭찬으로 그를 망치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것이 제가 우려하는 유일한 것입니다."  

그리고 1771년에 다시, "젊은 모차르트는 그의 나이에 비하여 확실히 훌륭하고, 나는 그를 정말로 끝없이 사랑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내가 보는 관점에서는, 모든 면에서 불만족스럽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같은 불평을 여기에서도 늘어 놓기 때문이지요. 그는 그의 아들을 좀 심하게 우상화하고, 그래서 그가 하는 것이라고는 아들을 망치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나는 소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좋은 감성을 높게 평가하고 그의 아버지의 알랑거림에도 그가 망쳐지지 않고 정직한 친구로 자라길 희망하고 있습니다."

같은 해의 12월에, 마리아 테레지아 황제는 밀라노 총독인 그의 아들 페르디난드에게 다음과 같은 우려를 이야기 하고 있다. "네가 나에게 젊은 잘츠부르크인을 써도 좋은지 묻는구나. 나는 네가 작곡가를 원하는 것인지 쓸모없는 사람들을 원하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그러나, 만약 그 일이 너에게 기쁨을 준다면, 나는 너를 방해할 생각은 없단다. 내가 이야기 하는 것은 네가 쓸모없는 사람들에게 직위를 주고 채용해서 부담이 늘게 되는 것을 방지하고 싶어서란다. 만약 그들이 채용된다면, 그들이 거지들처럼 세상을 돌아다녀 궁정음악가들의 품위를 더 떨어 뜨리게 만들 것이란다."

모차르트라는 이름은 볼프강이 1777년에서 1778년에 새로운 자리를 찾고 있을 때 이미 그 골치아픈 명성을 획득하고 있었다.

기사장과, 레퀴엠을 주문한 사신의 역할로서의 야누스의 얼굴을 한 검은 카니발 가면을 레오폴드가 연기하도록 한 것은 샤퍼의 빛나는 연극적인 아이디어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차르트가 이 작곡을 그의 아버지를 추모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믿을 만한 근거는 없다. 그 곡은 발세그-스투파흐 (Walsegg-Stuppach) 백작이 그의 아내를 위하여 주문한 것이고, 그는 그것을 자신의 작곡으로 보이게 했는데, 이것은 당시에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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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Amadeus" and Mozart: Setting the Record Straight By A. Peter Brown
Reprinted from The American Scholar, Volume 61, Number 1, Winter 1992.

번역에 쓰인 글:
© 1992 by the author. By permission of the publisher.
Steve Boerner steve@mozartproject.org
Revised November 22, 2001
출처: http://www.mozartproject.org/essays/brow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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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박적인 질투심

비록 제목은 아마데우스이지만, 샤퍼의 작품에서 중심에 있는 인물은 안토니오 살리에리 (1750-1825)이다. 살리에리는 1774년에서 1824년까지 비엔나의 궁정음악계에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말년에 그는 노인성 치매로 고통을 겪었다. 1824년 경에 비엔나에 떠돌던 루머 중에서 하나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것이 었다. 이 이야기는 베토벤과 다른 많은 사람들의 귀에도 전해졌다. 1825년 살리에리의 비서 두 명은 그들의 업무 중에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증언을 했고, 모차르트 담당의의 친구는 볼프강이 당시 비엔나에 퍼져있던 열병으로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입증되지 않은 가설로부터 샤퍼는 아마데우스의 중심 캐릭터,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대한 살인적인 질투에 사로잡힌 인물을 만들어 낸 것이다.

모차르트의 아내인, 콘스탄체는 루머의 확산에 부채질을 했는데, 그녀는 살리에리가 그녀의 남편을 모함했다고 믿었었다. 그러나 설사 뜨거운 적대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살리에리는 궁정 음악계에서 스스로의 영역을 보존하려고 했었을 뿐이 었다는 것이 더 그럴 듯한 설명일 것이다. 만약 궁정음악계의 힘이 매우 강력하고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성공을 방해하는 것에 집착하고 있었다면 "후궁으로부터의 도피"나 "피가로의 결혼", "코지 판 투테"는 작곡되지도 궁정극장에서 공연되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게다가, 그런 나쁜 관계가 둘 사이에 존재했다면, 살리에리는 확실히 1786년 2월에 쉔부른 궁전에서 모차르트와 함께 오페라의 홍보 전단을 같이 사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모차르트는 1787년 12월 궁정 실내작곡가로 임명되었고 그의 사망 즈음에는 성 스테판 성당의 지휘자로 임명되었었다. 살리에리는 심지어 1791년 10월 13일의 마술피리 공연에도 참석했었고 모차르트의 사망 전일에 그를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증언에 의하면 12월6일의 장례식에도 조문을 했었다.

만약 살리에리가 아마데우스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강박적인 질투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러한 질투심은 여러가지로 관찰되었을 것이다. 궁정작곡가로서 제국의 음악감독으로, 그는 많은 재능있는 학생들을 가르쳤다. 베토벤은 이탈리아 교재들로 그와 공부했고, 살리에리는 슈베르트의 특별한 재능을 일찌기 발겼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오페라, 노래, 4중주, 교향곡, 무엇이던지 작곡을 한다." 1816년 6월에 존경받는 카펠마이스터는 황제 즉위 50주년을 축하하며 다음과 같이 그의 일기장에 슈베르트에 대한 개인적이고 정직한 찬사를 남겼다.

모든 제자들이 주위에 모여 그의 희년을 축하하면서 각자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연주를 해주는 것을 보며, 요즘의 작곡가들을 얽매는 경향이 있는, 그리고 -거의 전적으로 - 위대한 독일 음악가 (베토벤)의 덕택으로 우리가 얻게된, 모든 기발한 것들 -로 부터 벗어나 자연의 단순한 표현으로 되어 있는 제자의 작품들을 듣는 것은 어느 음악가에게나 즐겁고 설레이는 일일 것이다. 그런 기발함 (또는 기이함)은 비극적인 것과 코믹함, 성스러움과 세속적임, 즐거움과 불쾌함, 영웅적인 긴장감과 단순한 소음을 구별하지 않고 혼동을 준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사랑이 아닌 광기를 일으킨다. 그것은 신에 대해 경건한 마음을 가지게 하기 보다는 경멸의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제자들에게 이런 무절제함을 금지시키는 것, 그리고 그들을 자연의 순수한 원천에 머무르게 함으로써, 현재의 부자연스러운 영향에도 불구하고 글룩의 발자취를 좇아, 자연에서 영감을 얻는 음악가는 가장 큰 만족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번역이 잘 안되네요..ㅜㅜ)


안셀름 후텐브레너 (Anselm Huttenbrenner)는 살리에리가 항상 모차르트에 대하여 "특별한 존경으로 가지고" 이야기 했고,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에게 궁정 도서관으로 부터 악보들을 빌려줄 정도로 이 두 작곡가가 친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콘스탄체의 언급을 제외하고는 살리에리와 모차르트가 사이가 나빴었다는 객관적인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들의 관계는 건전한 직업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영화에 따르면, 살리에리의 질투심은 그가 이탈리아에서 소년이었던 시절 "모차르트처럼 훌륭한 작곡가"가 되고 싶었던 그의 소망에 근거한다. 노년의 살리에리는 고해신부가 "모든 인간은 신 앞에 평등하다"고 말하자 그 자신을 다시 한번 모차르트와 비교하며 그 경구를 의심하는 장면은 탁월한 장면이다. 그러나 1760년경에 이탈리아의 젊은이에 의하여 주장되어진 "위대한 작곡가"라는 개념은 거의 반세기나 앞선 것이며 사실은 거의 전적으로 19세기의 독일의 개념이다.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의 역사적인 실질에 부합하는 것은 그가 궁정작곡가와 제국의 카펠마이스터로서의 직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그가 비엔나 봉봉을 즐겼다는 것 밖에는 없다.

살리에리가 역사적으로 위대하다는 평가를 얻지는 못했슴에도 불구하고, 그는 궁정을 위하여 오페라를 작곡하고 의심할 수 없는 음악성을 가지고 있던 매우 존경받는 성공적인 작곡가였다. 대조적으로 아마데우스에 나오는 살리에리의 음악은 그의 진정한 재능에는 못 미치는 단순한 것이었다. 모차르트의 즉흥성과 연주 기술이 예외적으로 뛰어난 것이었슴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살리에리의 재능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살리에리를 최소한의 재능만 있는 음악가로 묘사함으로서 음악적인 재능의 차이를 대조적으로 보여 주었고, 그럼으로서 샤퍼의 계획대로 드라마를 진행시켰다. 살리에리의 음악은 불멸성을 획득할 수는 없었을지는 모르나 늘 올바르고, 재능이 있으며, 적절한 것이었다.

주변인물들의 성격

살리에리의 고용주였던 요세프 2세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낮게 평가되어 있다. 샤퍼와 포먼은 황제를 순진하고 잘 교육받지 못한 음악가로 그려내었다. 그가 살리에리의 쉬운 행진곡 소품을 가지고 고생하는 장면이 바로 이런 점이다. 그러나, 요세프 2세는 음악적으로 세련된 사람이었고 꽤 수준 높은 연주가였다. 황제는 그의 극장 관리에 참가했었고 거의 매일 저녁 실내악을 위한 시간을 가졌고 가끔은 거기에서 적극적으로  첼로나 건반악기 파트를 연주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에는 그는 벤첼 라이문드 비르크 (Wenzel Raimund Birck, 1718-63)의 학생이었고, 1762년에는 요한 아돌프 핫세 (Johann Adolf Hasse)가 황제의 가족들을 위하여 작곡한 것으로 되어 있는 연도곡을 오르간으로 연주했었다. 모차르트의 '후궁으로부터의 탈출'에 대한 요세프의 반응은 "너무 음표가 많다"라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의견을 부적절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런 의견은 18세기에 전문가와 아마추어들 사이에서 널리 인정되었던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하이든에게 헌정된 모차르트의 6개의 현악사중주를 "잘못된 음표들이 너무 많이" 있기 때문에 불가해하고 연주할 수 없는 곡들로 여겼었다. 몇몇 사람들은 곡에 불만족하여 모차르트의 출판인인 아르타리아 (Artaria)에 악보들을 반품하기도 했었다.

샤퍼가 그린 잘츠부르크 대주교인 히에로니무스 콜로레도 (Hieronymous Colloredo)는 요세프 2세의 정치적, 이념적인 대척점이었다. 아마데우스에서 요세프는 대주교를 화나게 하고 싶어 했다. 사실 지기스문트 크리스토프 슈라텐바흐 (Sigismund Christoph Schrattenbach)의 사후에 콜로레도를 뽑은 것은 잘츠부르크에서 요세프의 이념을 실현시키기 위한 두드러진 변화였다. 슈라텐바흐는 자비롭고 콜로레도는 오만하고 까다로운 사람으로 알려진 것은 주로 모차르트 일가의 서신교환으로 부터 유래된 것이다. 모차르트 가족의 의견에 근거하여 대주교나 다른 어떤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고용과 자유로운 여행을 보장받고 싶어하는 데에 주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매우 편향된 근거로 그들을 판단하는 것이다. 콜로레도는 재직 시에 계몽주의적인 견해와 행동을 보여주었고, 슈라텐바흐는 모차르트 일가에 대한 자비로움을 보여주었다. 볼크마르 브라운베렌스 (Volkmar Braunbehrens)는 그를 "매우 경건한 척하는 괴벽스럽고, 변덕스러운 고집불통이며 대주교보다는 아이들의 사제가 훨씬 나았을 것"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모차르트의 어머니는 1778년 파리에서 사망했고 그의 장인은 1779년 비엔나에서 사망했다. 샤퍼와 포먼은 영리하게 돈지오반니와 마술피리로의 등장인물들부터 생존해 있던 다른 부모들 (아버지와 장모)의 성격을 비교하여 촛점을 맞추었다. 레오폴드 모차르트는 어두운 화음이 같이 나오면서 기사장이 되고, 마리아 카실리에 베버는 밤의 여왕이 된다. 모차르트는 그의 아버지에게 프로이 베버를 매우 까다로운 사람으로 묘사했었는데, 밤의 여왕으로 비유한 것은 하는 것은 성격이 어떠했던가를 잘 나타내어 준다. 그러므로, 비록 콘스탄체의 어머니가 영화에서 주변적인 인물로만 머무르고 있기는 하지만, 아마데우스에서의 그녀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한, 대체로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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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Amadeus" and Mozart: Setting the Record Straight By A. Peter Brown
Reprinted from The American Scholar, Volume 61, Number 1, Winter 1992.

번역에 쓰인 글:
© 1992 by the author. By permission of the publisher.
Steve Boerner steve@mozartproject.org
Revised November 22, 2001
출처: http://www.mozartproject.org/essays/brown.html

Posted by 슈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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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들이 음악가들에게 받는 존경이나, 많은 청중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는 점을 보면, 그는 아마도 서양음악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작곡가일 것이다." 1980년판의 뉴그로브 음악사전은 이와 같은 칭찬과 더불어 베토벤에 대한 글을 위엄있게 시작한다. 이 문장은 10여년 후 독일 골리앗 (역주: 베토벤을 지칭)에게 보다는 모차르트라는 다윗에게 들어 맞게 되었다. 이 해 (1991년)가 모차르트의 사망 2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순수한 고전적인 이미지가 베토벤의 더 외향적인 표현보다 선호되는 시기가 왔기 때문이다.

라디오 채널을 휴 다운즈나 피터 우스티노프가 모차르트 스페셜을 진행하는 PBS로 돌려보라. 또 채널을 상업방송들 중의 하나로 돌려보라.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K.466과 "작은" G단조 교향곡 K. 183/173dB가 맥킨토시 컴퓨터를 팔고 있고, 돈지오반니는 Cheer 세탁세제를 선전하고, 피가로의 결혼은 Sirocco 자동차를 팔고 있고, 레퀴엠의 라크리모사는 Lee 청바지를 칭찬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또 다른 피아노협주곡 (K.482)는 맥스웰하우스 커피광고를 장식하고 있다. 모차르트가 어린 시절에 쓴 교향곡의 발견은 뉴욕타임즈의 일면을 장식한다. 딜러와 수집가들은 작은 기록 조각이라도 얻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모차르트의 서명은 명화들과 같은 가격에 팔리고, 언젠가 딜러들은 "Andretter" 세레나데 K.185를 조각내어 각각 따로 팔아 엄청난 이윤을 남기기도 했다. 피가로의 결혼과 돈지오반니는 현재 라보엠과 나비부인과 박스오피스에서 티켓판매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런 모차르트의 대중화는 이로 인하여 가장 많이 이익을 얻고 있는 오페라하우스나 콘서트홀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며, 무대와 영화로부터 온 것이다. 다른 어떤 요소보다도, 1980년대의 모차르트 열풍은 피터 샤퍼의 연극 '아마데우스'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연극과, 이어서 밀로스 포먼이 감독한 동명의 영화는 다른 어떤 것들이 작곡가 사후 200년 동안 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모차르트를 위하여 한 셈이다. '아마데우스'는 런던, 워싱턴, 뉴욕에서 상연되었고, 비엔나의 부르크극장 (Burgtheater)과 부다페스트의 넴제티 신하즈 (Nemzeti Szinhaz)에서 상연될 때에는 독일어, 헝가리어로 번역되었다. 샤퍼은 무대 버전을 계속적으로 수정했는데, 그는, "분명함, 구조적인 질서 그리고 드라마에의 거의 강박에 가까운 추구..... 런던 버전에서 잘못된 점의 하나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몰락과 거의 관계가 없게 보였다는 것이었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영화에서, 샤퍼와 포먼은 다시 원고를 수정하였는데, 단지 새로운 미디어를 위한 변경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수의 더 순진한 관객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둘은 객관적인 "볼프강 모차르트의 삶"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동의하였다. 이 점은 아무리 강하게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분명히, 무대에서의 아마데우스는 작곡가의 전기 다큐멘터리로 의도되지는 않았고 영화는 더욱 더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주제넘게 들릴 지도 모르지만 작가가 그의 이야기를 픽션으로 장식하는 월권 - 그 중에서도 특히 청중들의 애간장을 녹이고, 주제를 강조할 목적으로 - 을 했다고 본다.

영화는 무대에서 보다 훨씬 더 그러한데,  영화는 많은 관객들에게 그럴법한 드라마를 역사 속의 시간, 장소, 실존인물들로 바꾸어 인식 시켰다. 무대공연에서 경고할 수 있었던 부분은 셀룰로이드 필름에는 넣을 수가 없었고, 픽션은 진실과 분리되지 않았다.

아마데우스는 궁정 작곡가인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모차르트의 작곡가로서의 신적인 재능에 대한 깊은 질투심에 중점을 둔다. 모차르트의 세련되지 못한 태도와 미성숙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이 그의 인격으로 내려와서 만든 것과 같은 작품들을 하나하나 만들어 내었다. 그는 그의 이름대로 진실로 "아마데우스"의 축복으로 신의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연극과 영화 둘 다 작곡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10년, 즉 1781년 잘츠부르크 대주교에 의해 해고된 후로부터 사망 시까지의 10년을 다루고 있다. 이 시기에 모차르트는 비엔나에 거주하였고, 궁정 작곡가로서의 일상업무로부터 자유로운 작곡가가 되었으나, 재정적인 안정성을 위협받게 되었다. 이 10년동안 모차르트는 많은 곡들을 작곡하였는데, 모두 놀랄만큼 우수한 곡들이었다. 아마데우스는 살리에리의 모차르트에 대한 경쟁관계에 촛점을 맞추기 위하여 비엔나 궁정의 장면들을 많이 설정한다. 몇몇 상황들이 그럴 듯하기는 하지만, 많은 부분들은 궁정 생활에 대한, 그리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삶에 대한 비현실적인 왜곡이다.

영화가 개봉한지 7년 이상이 지난 오늘날, 음악학자들은 여전히 볼프강, 콘스탄체 그리고 레오폴드 모차르트와 요세프 2세 황제, 그리고 안토니오 살리에리에 대하여 질문을 받는다. 그들은 정말 그러했었는가? 1991년 '모차르트의 해'는 이런 문화 아이콘의 초상을 검토하여 기록 바로 세우기를 시작할 시기이다.

'장식으로의 픽션' (역주: 사실이 아닌 내용을 극에 삽입하여 주제를 부각시키는 것을 말함)은 작가들에 의한 창조와 역사적인 진실 사이에 존재하는 심연을 과소평가하게 한다. 샤퍼와 포만 둘 다 모차르트의 전기적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역사적인 논란거리들도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들이 모차르트의 삶을 변형시킨 것은 다폰테가 보마르셰의 연극 피가로의 결혼을 오페라 대본으로 바꾼 것과 유사했다. 길이는 매체의 형식에서 주어진 시간에 맞도록 만들어졌고, 등장인물의 수는 감소되었으며, 상황은 재정비되고 결합되어졌다.

그러나, (극에서의) 등장인물들의 설정과 동기는 18세기 삶의 재창조일 수도 있다. 만약 샤퍼와 포먼이 그렇게 했다면, 또 그것을 의도했었다면, 그들의 영화의 힘이 오늘날의 청중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감소했을 것이다. 동기, 목표 그리고 감정 또는 적어도 모차르트 시대의 사람들이 표현하고 유지했던 방식은 확실히 우리와는 달랐을 것이다. 예를 들면, 볼프강과 콘스탄체 모차르트는 6명의 아이들을 낳았지만, 생존하여 어른으로 성장한 것은 둘 뿐이었는데, 이러한 비율은 그 당시에는 통상적인 것이었다. 만약 아이들의 죽음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 1990년대에 볼 수 있는 반응과 같은 크기였다면, 그들은 결혼생활 내내 거의 계속적으로 슬퍼만 하고 있었어야 했을 것이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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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Amadeus" and Mozart: Setting the Record Straight By A. Peter Brown
Reprinted from The American Scholar, Volume 61, Number 1, Winter 1992.

번역에 쓰인 글:
© 1992 by the author. By permission of the publisher.
Steve Boerner steve@mozartproject.org
Revised November 22, 2001
출처: http://www.mozartproject.org/essays/brow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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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 프랑스에 주문했던 하모니아문디 50주년 기념 박스가 도착했다. 배송비를 생각하여 이런 저런 프랑스 음반들도 같이 주문했는데... 그중의 하나가 쁘띠봉의 음반이다. 쁘띠봉의 음반은 국내에서도 그럭저럭 구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이제 실컷 들어볼 수 있을 것 같아 50주년 기념 박스만큼이나 맘에 든다^^

그녀의 모습을 처음 봤을 때는... 이 여자 뭐하는 거지? 성악가가 맞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노래를 듣고는 더 충격을 받았다. 애니메이션이나 아이들영화에 등장할 것 같은 외모인데, 목소리는 파워풀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왔다. 인지 부조화라고나 할까... 하지만 계속 보고 들으니, 정말 매력적인 가수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쁘띠봉은 나보다 이틀 먼저 태어났다. 1970년 2월27일생. 물론 프랑스 출신. 많아야 삼십대 초반일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나이는 많다. 주로 프랑스 바로크 음악을 녹음한 음반을 내고 있지만, 모차르트, 하이든의 오페라 작업도 했다.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그녀의 Die Entführung aus dem Serail 영상도 너무 좋다) 원래는 플라스틱 아트를 공부하다가 음악을 했는데, 그런 미술적인 백그라운드가 그녀의 독특한 꾸밈새와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작곡가 남편과 아들 하나가 있다고 한다.

유튜브에는 나름 다양한 그녀의 영상이 올라와 있는데, 좀 충격적인 것은 오펜바흐의 호프만이야기에서 올림피아로 나온 영상 두 개이다. 하나는 아래에 스크랩되어 있고, 나머지 하나는 누드씬인 것 처럼 꾸며놓은 의상을 입고 노래하는 것이다. 올림피아라는 캐릭터가 그녀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유니버설뮤직에서 만들어준 그녀의 홈페이지는 다 불어라서 이해가 쉽지 않다.
http://patriciapetibon.artistes.universalmusic.fr/

쁘띠봉이라는 재미있는 이름과, 특이한 헤어스타일, 멋진 연기력과 귀여운 마스크.... 그리고 무엇보다 부드럽고 강하고 아름다운 완벽한 목소리!! 언젠가는 멋진 그녀를 만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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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듣고 느끼는 감동은 완벽한 연주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정말 빈틈없는 연주이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경우도 있고, 간혹 실수도 있지만 눈물나게 아름다운 경우도 있다. 악기의 소리보다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더 많이 들리는 음반에서도 가슴아픈 감동이 전해져 오는 경우도 있고, 깔끔하고 세련된 자켓과 흠 하나 없는 녹음에서도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Marshall C. St. John이 모아 놓은 카잘스에 대한
스크랩북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했다.

It is not technique on a particular instrument that makes a man or woman a great musician, but love of music and people. In Casal's old age his technique slipped quite a bit, and even in his prime he probably did not have the technical abilities of Starker, Rostropovich or Ma. But he played his music from a heart full of love, dignity and respect. He truly cared about people, and freedom and justice; and so he moved those who heard him, and he had a great impact on the musical world, and the world at large. Students hoping to be professional artists should give time to developing their souls and minds, and humanity, along with their fingers and bow arms.

음악은, 분석을 하기에도, 공부를 하기에도 좋은 소재이고, 역사와 뒷배경을 알아 보는 것도 모두 모두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가슴 떨리는 감동은 정말 알 수 없는 곳에서 오곤 한다. 음표들은 연주자의 머리로, 가슴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악기를 통하여 나의 머리로 그리고 가슴으로 들어 온다. 그리고 모두가 다른 음악이 되는 것이다....

아무런 기교도, 화려한 무대도 없이 깨끗하지도 않은 음질의 CD에서 들려지는 카잘스의 바흐가 그토록 따뜻하고 감동적일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일까. 
Posted by 슈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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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raits of Anomaly:
Nannerl Mozart, Fanny Mendelssohn, Clara Schumann

Connie Sunday © 2006
(Women's Studies essay on the lives of three eminent women in music)
"여성의 교육은 항상 남성에 상대적인 것이어야 한다. 즐겁게하고, 우리에게 유용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들을 사랑하고 존중하게 만들어야 하고, 어린시절에 우리를 교육해야 하고, 성장했을 때는 우리를 돌보아야 하며, 충고하고, 위로하고, 우리의 삶을 편안하고 즐겁게 해주어야 하는 것 -- 이것이 전 시대를 통틀어 여성의 의무인 것이고 그들이 유년기에 배워야 할 것들이다" 루소

"100명의 훌륭한 여성 작곡가들 중에서, 합리적이고 좋은 아내, 세심하고 유능한 주부, 그리고 사려깊은 어머니로서의 모든 의무를 동시에 만족시는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찾아내는 것은 매우 어렵다." 요한 캠페 (Johann Campe)


우리들의 문화를 점검하고 성 정체성에 대하여 비교 문명적인 비교를 하면, 우리는 이제, 약 10년전까지는 남성의 편견이 거의 모든 질서의 문헌들을 "특징지우고" 있었슴을 알 수 있다. 특정한 극도로 비정상적인 예외들을 제외하고는, 여성은 가족 구성원을 생산해낸다는 기능으로 말미암아, 핵가족 안에서 고립되어 있었고, "온실" 그리고 집안의 영역의 존재로 격하되어 왔었다. 남성들은 문화의 지배자들이었고, 남성적인 세계관이 압도하고 있었다. 여성들은 주변의 인물로 보여졌으며, 남성들이 대표하고 있는 체제에는 위협이었다. 권력은 남성의 손에 있었고 여성은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교육을 받았다. 이 글에서, 나는 3명의 예술가들이 어떻게 그들의 인생 궤도를 통하여 사회적인 편견이라는 쉽지 않은 바다에서 어떻게 항해했었나 하는 것을 보여주려고 할 것이다.

여성들은 중세시대부터 작곡을 해왔으나, 19세기 초가 되어서야 언론의 인정과 더 많은 청중과 더불어 여성음악가의 수가 현저하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남성과 관련이 있었던 영역에서 여성이 가장 많은 참여도를 보여 준것은 유럽의 사회적, 정치적인 조류가 가져다 준 결과이며 특히 피아노의 발명의 결과이기도 하다. 솔로와 실내악 작품 (특히, 가곡 또는 노래)의 분위기는 여성들이 연주자로 받아들여 질 수 있는 집안이라는 공간과 편안하게잘 맞았다. 이는 큰 규모의 작품이 연주되던 공공장소의 경우와 대조적인데, 그 곳에서 오페라, 종교음악, 관현악 음악들은 점잖은 여성들에게는 금지되어졌었다. 19세기의 여성의 창조적인 성취 - 주로 가곡에서 - 는 남성 작곡가들과 비교하여도 우수한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몇몇의 작품들은 이 시기 최고의 작곡가들에 필적할 만하다.

여성들은 직업적으로 자리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여성도 바흐가 했던 역할을, 정기적으로 종교의식에 사용되는 작품을 작곡해야 하는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성 바흐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현대의 음악학에서는 전통적인 주류에서 여성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본다. 이것은 그들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음악학의 본성이 문헌들 (여성들의 음악에 대한 문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나, 가장 진보적이고 음악 유형의 변화를 이끌어갔던 예술가들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인데, 그 곳에서 (금세기까지) 여성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회적인 편견은 1750년 -1900년까지 여성음악천재가 결핍되어 있었던 이유의 중심적인 요소이다. 18세기에는, 여성들은 배울 수 있는 지적, 감정적인 역량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여성이 지식을 획득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며 여성으로서의 진실한 직업인 아내와 엄마의 일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믿어졌었다. 모세 멘델스존(Moses Mendelssohn)은 그 시대에 계몽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으로 생각되어졌지만, 그의 약혼녀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적당히 배우는 것은 숙녀를 만들지만, 학자를 만들지는 않습니다. 눈이 충혈될 정도로 독서를 하는 소녀는 웃음거리가 되어 마땅하지요."

여성들은 에스코트없이 돌아다니는 것이 허락되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연주회를 여는 것은 어린 소녀의 품행이나, 성격에 위해가 된다고 생각되어졌다. 이는 소녀들이, 명성을 얻기 위하여 필수적인, 도움을 줄 수 있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효과적으로 차단했다. 파니 멘델스존은 19세기초에 가장 지적이고 문화적으로 재능이 있는 가문들 중의 하나에서 태어났지만, 그녀가 32세가 될 때까지 대중들 앞에서 연주를 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작곡은 출판되지만 않는다면 더 많은 대중들의 주목을 받지는 않았다. 여성들은 그들의 작곡을 과소평가하였고, 계속하기 위하여는 과도할 만큼 칭찬을 받아야만 했다.

여성들의 활동범위와 성취가 집안일로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직업적인 교육은 부족했다. 여성이 교육을 받을 때에는, 높은 수준의 교육과 부정적인 사회의 태도 사이에 날카로운 불일치가 있었다. 여성의 일은 전문가의 눈에는 유감스러운 것이었다. 여성이라는 것은 아마추어라는 것을 뜻했고, 딜레땅띠즘의 분위기가 여성들의 작품에 대한 토론에는 항상 함께했다. 여성들은 그들의 재능을 다른 사람들을 감정적으로 보조하는 것이나 집안일에 대한 책임감으로 순화시켜야만 했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거나 매력적인 개인으로서의 여성이 양보해야만 했던 것이 전체 여성들에게 맞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여성이 스스로를 부양하려는 필요는 여성의 일에 대한 권리와 직업을 가질 권리의 문제를 경제적으로 중요한 문제로 변화되었다.
 
19세기 중에는 충분히 교육받은 소녀들이 여성스러운 부분을 담당하도록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희곡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그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7세기와 18세기의 새로운 운동 중의 하나는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는 것이었다. (이전에는 여성 음악학도들은 집에서 개인교습을 받거나 또는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고 수녀가 되곤 했다.) 여성들은 가톨릭 학교에서 공부하거나, 거장음악기들 밑에서 도제수업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이같은 사정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여성들은, 주로 가수들인데, 하층 직업으로 생계를 유지했었다.

Nannerl Mozart모차르트에 대한 기록에서는 어떤 것도 그의 능력있는 누이인, 난넬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난넬은 어린 천재 남동생과 그들의 부모와 같이 3번의 유럽 순회연주에 동반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여행기록에서는 항상 재능있는 누이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고 설명이 이어진다.

그러나, 소녀 난넬의 재능은 보통은 기록되어져 있다. 그녀가 부모와 남동생과 함께 했던, 런던과 파리를 포함했던 3번째 서유럽 여행에서 (1766년까지 계속되었다), 프리드리히 마이콰이어 그림(Friedrich Meichoir Grimm) 남작은 그녀가 피아노를 뛰어나게 연주하며 가장 위대하고 가장 어려운 작품들을 놀랍게 정확하게 연주한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남동생에 결코 못지 않은 초기의 재능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로브 음악사전의 다음의 비극적 문장은 사람들의 감적을 자극한다: "1769년부터, 난넬은 그녀의 예술적 재능을 오로지 집에서만 보여주도록 허락받았다." 그녀는 18세였다. 그녀의 남동생이 작곡가와 연주의 거장으로 해외에서 승승장구하는 동안, 그녀는 어머니와 같이 잘츠부르크에 남아 있었다. 그녀가 33세였을때 그녀는 성 길간 (St. Gilgan)의 판사와 결혼했다. 세 아이를 낳고, 남편이 사망한 후에, 그녀는 잘츠부르크로 돌아와서 피아노 선생으로서 단순하고 평온한 인생을 살았다. 사람들은 위대한 모차르트의 누이에 대해 연구하고 싶어했다. 1839년, 그녀가 사망하던 해에 그녀는 가난과 외로움으로 눈이 멀고, 기운이 없었고, 지쳤으며, 약해져서 거의 말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작곡에 손을 대었고 그 작품들은 남동생이 인정할 만한 것들이었으나, 그녀의 작품 중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만역 그녀가 진실로 그녀의 유명한 남동생만큼 능력이 있었다면 난넬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이 남는다 -- 아마 모든 시대를 통틀어 뛰어난 음악천재가 되었을까? 남매는 각자 결혼을 할 때까지 가깝게 지냈고 그녀의 일기와 편지는 모차르트 가족에 대한 연구의 중요한 문헌들인데, (이러한 난넬의 삶이) 세계적으로 엄청난 손실이라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파니 멘델스존은 이러한 Fanny Mendelssohn궤도에서 좀 더 발전된 예인데, 그의 남동생에 필적할 만한 음악적 재능을 일찌기 보여 주었고, 동생처럼 베르거(Berger)와 젤터(Zelter)에게서 피아노와 음악이론을 배웠는데, 그 때 그녀는 남동생과 동등한 수준이었다고 알려진다. 옥스포드 사전은 그녀를 두 번 모욕했는데, 한 번은 그녀가 "거의 그녀의 남동생만큼이나 훌륭한 피아니스트"라고 언급했었고, 또 그녀를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라고 칭했었다.

파니 멘델스존은 직업적인 음악가가 되는데 반대하는 그녀의 아버지의 완고한 훈계와 그녀가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고 집안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작곡을 계속했다. 펠릭스는 그녀를 작곡가로서 호의적으로 평가했는데, 그것은 그녀의 자존심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었으나, 그런 재능을 가진 사람의 남동생이라는 것을 그는 자랑스러워 했으나, 전반적으로 지지하지 않게 되면서 더이상 자랑스러워 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진지한 작품의 출판만을 고려해요... 그리고 인생 전부를 작가로서 살려고 하는 사람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파니는.... 작가를 하고 싶어하지고 않고, 천직으로 삼으려고도 하지 않아요. 그녀는 그런 면에서 너무나 여성적인데, 그것은 적절한 것이지요. 그녀는 가정을 돌보고 있으며, 우선적인 주부로서의 일을 하고 나서가 아니면 대중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음악세계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요. 출판을 한다는 것은 그녀가 이러한 책임을 수행하는 것을 방해할 뿐이고, 저는 이런 점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만약 그녀가 스스로 출판하기로 결정하거나, 또는 헨젤을 기쁘게 하려고 한다면, 말했듯이, 저는 가능한한 도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만, 제가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 어떤 것을 하도록 그녀를 격려하는 것은 제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파니는 포괄적인 교육을 통하여 세상에 대한 깊이 있고 통찰력있는 이해를 가질 수 있었으나, 그리고 나서는 교육받은 것을 실행하고 바로 그 세계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인당했다. 아브라함 멘델스존은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에게 음악은 장식일 뿐이고 그래야만 한다. 너는 진정한 너의 천직 - 젊은 여성들에게는 유일한 천직 -을 위하여 성실히 열심히 준비해야만 한단다.  그것은 가정주부가 되는 것이란다." 펠릭스의 승인과 지지로 그녀는 작곡한 200곡이 훨씬 넘는 의 리트를 출판할 수 있었지만, 그녀의 아버지와 남동생은 반복적으로 그녀가 직업적인 작곡가가 되는 것이나 그녀의 작품을 출판하는 것을 반대했다. 여성 리트 작곡가들 대부분이 대중에게 알려지지 못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1775년에서 1850년까지 이루어 낸 업적은 훌륭하고 존경받을만 하며 진지한 학구적인 연구, 출판 그리고 연주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녀가 24세에 화가인 헨젤과 결혼했을 때, 펠릭스는 이미 작곡가와 지휘자로서의 길을 전도양양하게 시작한 후 였다. 그녀는 남동생의 성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지만 그녀의 삶은 "집에서의" 음악에 바쳐져야만 했다. 일요일에 베를린에서 가족들과 음악회를 하는 것이 고립되어 음악을 하던 그녀에게 단 하나의 출구였고, 그녀는 스스로의 작품들을 작곡하고 지휘할 수 있었다. 빌헬름 헨젤은 그녀를 격려하였으나, 펠릭스는 작품이 출판되어 알려지기를 바라는 누이의 희망과, 제한적으로 대중들을 접하는 것이 그녀의 작품과 자존심에 미칠 영향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의 창작품에 대하여 아무도 의견을 내지 않거나 아주 조금의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그 작품들에 대한 모든 기쁨 뿐만 아니라 그 작품들의 가치를 판단할 힘까지도 잃게 된다."
파니의 초기 작품들 중 3곡은 펠릭스의 Op.8과 9에 포함되어서 출판되어졌는데, 그녀가 작곡한 이중창은 그 모음곡 중에서 최고의 것이었다("An des lust-gen Brunnes Rand"). 이 초기 작품들은 남동생의 작품과 유사하기는 하지만, 그녀의 개성적인 특징과 표현을 보여준다. 더구나, 그녀는 하나의 서곡과 5개의 오케스트라 부분을 포함하는 성악곡도 작곡하였다. 그녀의 작품 대다수는, 대규모의 칸타타들과 오라토리오를 포함하여, 출판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그 시대의 최고의 작곡가들과 연주자들은 감상적인 살롱음악과 요점없는 기교만 있는 음악의 양극단을 피하기 위하여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중 이런 노력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두 명이 파니 멘델스존과 클라라 슈만이었다.

Clara Schumann클라라 비이크 슈만은 그 세기에 가장 위대한 재능을 가졌던 사람들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초기에 그녀에게 일어났었을 지도 모르는 일들은 먼저 일어났던 위의 두 이야기들로 이미 설명이 되었을 것이다. 클라라 슈만이 그들과 가지는 공통점은 위대한 예술가와의 관계 또는 교육이다. 모차르트가의 아이들에게는 레오폴드가 있었고, 파니는 주변의 환경이 모두 훌륭했었으며, 클라라에게는 교육자로서의 재능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녀의 아버지가 있었다.

비록 그녀의 남편 로베르트에 뮤즈의 역할을 한 것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클라라 슈만은, 당시 유럽 사회가 일반적으로 여성의 직업인으로서의 역할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보면 두드러지는 성공을 얻었고, 그 시대의 음악에 결정적인 흔적을 남겼다. 그 세기의 천재적으로 위대한 음악가와 교육자의 한사람으로서 그녀는 개인적인 그리고 음악적인 영역에서 많은 혁신을 가져왔다. 그녀가 집을 떠나 모험을 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심한 과소평가이다. 그녀의 남편이 사망하였을 때, 환경의 변화로 인하여 그녀는 더 많이 사회활동을 할 수 있었고, 그녀는 7명의 아이들을 부양하기 위하여 다시 한번 그녀가 9살 때 시작했었던 전문 연주가로서의 삶을 택했다.

그녀는 앞에 악보를 두지 않고 리사이틀을 했고, 보조해주는 음악가들 없이 연주를 했던 최초의 사람들 중 하나였다. (즉, 현대의 연주처럼) 그녀의 선곡과 수준은 솔로 피아노 리사이틀의 성격 자체를 변화시켰다. 그녀는 파가니니, 리스트, 탈베르그 그리고 루빈스타인의 동료였고,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 그리고 그녀의 남편의 작품과 그녀를 사모했던 젊은 브람스의 작품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홍보자였다. 그녀는 세련된 연주를 통하여 당시에 거슬리고 이해되지 않는다고 여겨지던 베토벤의 음악을 대중화시켰다. 그녀의 연주회들은 매진되었었고, 그녀는 어디에서나 열렬한 환호, 따뜻한 리뷰, 선물들 그리고 존경 속에서 맞아들여졌다. 여전히 그녀는 작곡가로서의 역할을 우선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나는 이미 로베르트가 나에게 적어준 Ruchert의 시로 (곡을 쓰려고) 몇 번 시도를 했다. 그러나 잘 되질 않았다 - 나는 작곡에는 전혀 재능이 없다."
그녀의 국제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전기들에서 그녀는 자주 종속적인 - 또는 수치스러운 - 모습을 하고 있다. 그녀는 아직 본격적인 학문적인 연구의 대상으로서의 존엄성을 얻고 있지 못하다. 그녀의 삶에 대한 많은 세부사항들은 얼버무려져 있고 생략되어 있으며 서신들은 요약되어져 있다. 그리고 그 시대의 다른 어떤 연주자도, 남자건 여자건 간에 그 만한 시간동안 연주자로서의 경력을 유지해 온 사람은 없었는데, 그녀는 영국과 유럽에서 1,300회가 넘는 연주회에서 연주했다. 그녀의 동시대 여성들 대다수는 연주자로서의 경력을 반짝이는 데뷔와 빛나는 외모로 시작하곤 하지만, 결혼할 무렵 또는 압력이 너무 강해진다고 생각될 즈음에는 연주생활을 포기하곤 하였다. 클라라는 그녀 자신의 연주들을 관리하는 일도 떠맡았었다. 피아노들을 빌리고, 이동시키고 조율하게 했으며 홀, 조명, 난방들을 준비시켰고, 티켓을 인쇄하고 신문과 포스터에 광고를 실었으며 스스로의 의상을 준비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자신의 분신으로 생각했고, 그녀의 특별한 재능을 교육의 덕으로 돌렸다. 1816년에, 그는 잘 알려져 있고 성공한 플루티스트의 손녀인 마리안느와 결혼했다. 그는 클라라의 어머니가 딸의 재능에 기여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 적이 없으나, 그녀는 비범한 가수이자 피아니스트였다. 비이크 부부가 이혼했을 때, 클라라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기분이 좋을 때에만 아이들을 볼 수 있었는데, 이것은 아이들은 아버지의 소유라는 색슨 법률에 따른 것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성공적으로 그녀를 신동으로 훈련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적당한 작품, 물리적인 훈련, 연주회 관람 그리고 훌륭한 음악가들과의 만남이라는 그의 교육프로그램은 클라라의 여동생에게도 역시 사용되어졌다), 그는 그녀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매우 심하게 대응했다. 그녀와 로베르트 슈만은 이 문제를 법정에까지 끌고 가야했다. 그들이 승소하여 결혼을 허락받자,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수입으로 된 저금을 모두 앗아가고 결혼 생활을 막 시작해야하는 그녀에게는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남편이 그녀를 사랑하고 존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둘 다 그녀가 그 주변의 일상적인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녀의 일기에서: "나의 역할은 로베르트가 작곡을 하고 있을때 항상 그렇듯이 밀려있는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하루에 한 시간도 낼 수가 없다."

그러나, 클라라 슈만은 피아니스트로서의 그녀 자신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7명의 아이들과 정신병동에서 생을 마감했던 남편 때문에, 그녀는 35세에 그녀의 연주활동을 재개했다. (로버트: "우리는 해결책을 찾아 냈소. 당신은 동료를 데리고 갔고, 나는 아이들과 나의 작업으로 돌아갔소.") 그녀는 그녀 자신을 먼저 예술가로 여겼고, 부모의 역할은 두번째였다. 여행 중에, 아이들은 가족의 친구들, 조부모들 또는 기숙학교에 맡겨졌다. 그녀는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편지를 썼다. 맏아이가 어느 정도 자란 후 그는 가족들의 만남(종종 여름내내)이나, 연주 여행을 주선하고, 교습약속을 잡는 일을 도맡았다. 그들의 14년간의 결혼생활동안, 그리고 8명의 아이들 (하나는 아주 어려서 죽었고, 유산이 한 번 있었다)을 낳는 동안, 서로가 화내고 싸웠다는 이야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나는 사회적인 편견이 이들 세 명의 천재 여성들에게 가하여 져서 그들을 예외적인 위치에 놓이게 했던 각각의 상황의 종류를 이 간략한 전기글이 설명해 주었기를 바란다. 그들의 노력에는 희망적인 것이 있다. 이 삼부작에서 각각의 사람들은 그 이전의 사람들보다는 성공적이었다. 확실히 미래의 여성들은 이러한 추세를 계속해 나갈 것이고, 여성들이 사회에서 예술가로서 덜 예외적인 존재로, 더 많이 받아 들여지게 됨에 따라, 더 평등한 교육적이고 음악적인 기회의 배분으로 부터 혜택을 받을 것이다.  

주석 및 전기, 대표작품은 다음의 링크 참고:
원문 출처
또다른 출처 - pdf 다운로드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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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찾아 보고 번역하려는 생각은 파니 멘델스존에 대한 DVD - Requiem for Fanny - 를 보고 나서 들었다. 20세기.. 아니 거의 20세기 후반에 이를 때까지 여성 음악가들은 별로 많지 않았다. 연주가들은 종종 있었으나, 여성 작곡가는 정말 찾아 보기 어려웠다. 그래도 그 중에서 알려진 세 명의 인물이 바로 위의 난넬 모차르트, 파니 멘델스존과 클라라 슈만이었고, 나는 이 들 세명, 그리고 더 나아가 알려지지 않은 이전 시대의 여성 음악가들에 대해 알아 보고 싶어 졌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윗 글은 정말 "개론"적인 설명에 불과하다. 더 많은 연구들이 존재하고 진행 중인 것 같다. 클라라나 파니의 경우에는 곡이 남아 있어서 그녀들의 작품이 어떠했는지 알아 볼 수도 있다. (난넬의 경우에는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지만) 심지어 위키피디아에만 가도 위의 글보다는 훨씬 더 많은 정보들이 있다... 나중에 한 명씩 집중탐구를 해보면 재미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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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슈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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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Sibelius Finlandia, op. 26


핀란디아는 시벨리우스의 작품 중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곡으로 로운 세기가 도래하기 바로 직전인 1899년에 작곡되었고 1900년에 수정되어 오케스트라곡으로 완성되었다.


1899년 2월 러시아 황제인 니콜라스 2세는 핀란드공국의 자치권을 제한하는 "2월의 선언"을 발표한다. 이 선언은 핀란드의 문화예술인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시벨리우스도 그의 음악으로 정치적인 항의의사를 표시하기를 원했다. 1899년 11월, 표면적으로는 핀란드 언론인들의 연금기금 마련을 위한, 실제로는 자유언론을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한 민족적 역사극의 공연을 위하여, 시벨리우스는 핀란드의 역사적인 장면들을 묘사하는 6곡의 표제음악과 짧은 서곡을 작곡했다. 끝에서 두번째 곡인 “Great Hate”는 러시아 정복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파괴를 보여주며 어머니 핀란드가 추위에 떨고 있는 아이들과 함께 눈보라 속에서 전쟁, 추위, 기아,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는 장면이 묘사되고 시벨리우스는 이를 위하여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어둡고 가장 고통스러운 음악을 작곡했다. Great Hate에서 이어지는 마지막 곡인 “핀란드의 각성”은 그간의 고난이 승리의 영광으로 바뀌는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이 곡은 스웨덴에 이어 러시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독립된 국가를 가져본 적이 없던 핀란드 사람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며, 바로 이 마지막 곡이 현재 핀란디아의 초기버전이었다.


역사극의 공연 후, 수개월 동안 헬싱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로베르트 카야누스와 시벨리우스는 표제음악 중 좋은 곡들을 뽑아 핀란드에서 연주했으며, 이 모음곡의 피날레 부분을 유럽 순회공연 시에 연주하기도 하였다. 오케스트라가 파리 국제 박람회에서 이 곡의 피날레 (“핀란드의 각성”)을 연주함으로서 곡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고 시벨리우스는 핀란드 내에서 만의 유명세에서 벗어나 세계적인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핀란디아라는 이름은 1900년 이 표제음악의 피아노 편곡에 악셀 카펠란이 제목을 붙이면서 나오게 되었고, 핀란디아라는 이름으로 1900년 시벨리우스에 의하여 재작업된 이 곡의 오케스트라 버전은 1901년 카야누스의 헬싱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의하여 초연되었다.

러시아의 검열 때문에 이 곡은 핀란디아라는 이름을 불리워지지 못하고 1차대전 후 핀란드의 독립이 있기 전까지는 “즉흥곡” 등 다른 이름으로 감추어져 공연되기도 하였다.

 

곡의 대부분은, 핀란드 민중들의 투쟁정신을 고취하는, 열렬하면서도 휘몰아치는 듯한 음악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끝부분으로 가면서 고요함이 오케스트라를 장악하고 장엄하게 핀란디아의 찬가가 들려온다. 종종 전통적인 민속선율이라고 잘못 인용되기도 하나, 이 찬가 부분은 시벨리우스 자신의 곡이다.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이 찬가의 멜로디에 가사를 붙였었는데 시벨리우스 자신은 이 곡이 원래 오케스트라 곡을 위하여 쓰여진 것이라며 불평을 표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주제 멜로디는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전세계를 위한 국가로 쓰자고 제안했을 만큼 호소력이 있는 것이었다. 핀란드에서는 1940년 코스켄니에미에 의하여 쓰여진 가사가 가장 유명하고 현재는 핀란드의 준국가처럼 불리워진다. 이 노래는 “오 핀란드여 보아라 너의 날이 밝아오는 것을, 험난한 밤의 장막은 이제 걷히었도다”라는 가사로 시작한다.


핀란디아는 곧 포르테에서 포르티시모로 커지게 되는 금관의 우울한 고난의 동기로 시작한다. 목관은 성스러운 느낌으로 답하며 현들은 더 "인간적인" 목소리를 들려 주기 시작한다. 템포는 알레그로 모데라토로 바뀌며 금관의 팡파레는 투쟁 정신을 보여주고 알레그로의 템포는 승리의 자신감을 나타낸다. 유명한 찬가의 동기는 처음 목관으로 연주되며, 현이 이어서 찬가의 주제를 연주한다. 템포는 빨라지고 금관 팡파레가 다시 나오면서 금관이 찬가의 주제로 곡을 고조시키며 짧은 교향시는 승리를 선언하는 종결로 달려간다.

 

연주시간은 약 8분.


참고:

http://www.sibelius.fi/english/musiikki/ork_finlandia.htm

http://www.sfsymphony.org/templates/pgmnote.asp?nodeid=3772&callid=792

http://immaculatasymphony.org/past/Apr03.html

http://www.symphonypromusica.org/notes/9211.html

http://www.daytonphilharmonic.com/content.jsp?articleId=506

http://www.strathmore.org/eventstickets/calendar/programnotes.asp?id=2767

http://www.asianyouthorchestra.com/public_html/ayo%20new%20site%202/Note%20--%20Finlandia.html

http://www.kalamazoosymphony.com/concerts/2006/sibelius-notes.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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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보르작 교향곡 8번 G장조 (Dvorak, Symphony No. 8 in G Major Op. 88)
 
드보르작은 프라하 교외의 한 마을인 Nelahozeves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아마추어 음악가로 여관과 정육점을 운영했다고 한다. 삼촌의 후원아래 음악을 배울 수 있었던 드보르작은 1857년에 프라하 오르간 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했고 당시 새로이 문을 연 Prague  Provisional Theatre의 오케스트라에서 스메타나와 바그너의 지휘하에 비올라를 연주하는 경험을 얻기도 했었다. 그의 첫 교향곡은 1865년에 작곡되었는데, 이 곡은 영향력있는 비엔나의 비평가인 한슬릭(Hanslick)과 브람스의 눈에 띄게 되었고, 그 이후로 그의 명성은 서서히 전 유럽과 미국으로 퍼지게 되었다.

드보르작 교향곡 8번 G장조는 드보르작의 교향곡 중에서 9번 신세계 교향곡에 이어 두번째로 유명하고, 두번째로 많이 연주되는 곡이다. 이미 국제적인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얻고 있던 드보르작은 성공적인 영국여행을 마친 후 귀국하여 그동안 꿈꾸어 왔던, 언덕과 수풀에 둘러싸인, 보헤미아의 비소카 (Vysoka)의 소박한 전원주택의 음악실에서 그의 교향곡 중에서 가장 체코적인 곡인 G장조 교향곡 8번을 작곡하였다.


이 곡은 1889년 8월 26일에서 11월 8일까지 두 달 반 동안에 작곡 되었다. 악보에는 "To the Bohemian Academy of Emperor Franz Joseph for the Encouragement of Arts and Literature, in thanks for my election." 라고 헌정사가 쓰여져 있다. 곡은 작곡자 본인에 의하여 1890년 2월 2일 프라하에서 초연되었다.


교향곡 8번 가끔 “영국교향곡”으로도 불리는데, 사실 곡의 분위기나 주제는 영국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당시 드보르작은 베를린의 출판가와 약간의 분쟁이 있었고, 그리하여 그는 그의 곡들 상당수를 런던의 노벨로에게 보냈는데, 거기에는 이후에 "The English"라는 부제가 달리게 되는 8번 교향곡도 포함되어 있었고 이런 이유로 이 교향곡에 “영국”이라는 부제가 붙게 된 것이다. 드보르작은 영국에서 매우 유명했었고 1891년 6월에는 캠브리지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도 받았었는데, 그는 논문을 제출하는 대신, 학위수여식에서 이 G장조 교향곡을 지휘했다. 그는 또한 1893년 시카고의 세계 박람회에서 체코의 날에 이 교향곡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8번 교향곡은 활기찬 분위기의, 드보르작이 사랑했던 보헤미아의 민속음악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된 곡이다. 비록 종종 신세계교향곡의 유명세에 가리기도 하지만, 보헤미아의 시골길을 산책하는 듯한 이 작품은, 낙천적인 19세기 후반의 교향곡 작곡의 최고봉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이전의 소나타 형식을 벗어나 주제들이 자발적인 흐름을 보이는 듯한 방식을 보여준다.


1악장: Allegro con brio (G major) –
팀파티가 자유롭게 사용되며, 힘차고 열정적인 전개가 이루어진다. 첼로, 혼, 클라리넷이 장엄하고 서정적인 G단조의 주제로 시작되고, 새가 지저귀는 듯한 플룻의 멜로디로 이어진다. 곡은 점점 더 힘차고 빛나며 행진곡풍의 G장조 선율이 나오면서 율동적인 목관의 2주제가 나타난다.


2악장: Adagio (C minor) –
아다지오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꽤 속도가 있다. 현에 의한 C단조의 셋잇단음표의 업비트로 시작한다. 만족감으로 가득 찬 전원생활을 그리고 있으며 새들의 노랫소리로 곡을 메운다. 마을 축제와도 같은 분위기이다. 


3악장: Allegretto grazioso – Molto vivace (G minor) –
악장의 대부분이 3/8박자의 춤곡으로 되어 있고 끝부분에서 2/4로 변하고 2악장과 비슷한 방식으로 속삭이면서 끝나게 된다. 선율적인 매력으로 가득찬 우아한 왈츠이다. 중간에 시골풍의 춤곡으로의 갑작스런 변화와 두배로 빨라진, 끝부분으로 달려가는 코다는 체코의 춤곡인 Dumka를 연상시킨다. 중간에 나오는 주제는 "Pig-headed Peasants"라는 드보르작 초기의 오페라에서 사용한 것이었다고 한다. 


4악장: Allegro ma non troppo (G major) –
이 피날레는 가장 휘몰아치는 듯한 악장이다. 팡파레의 활발한 2/4로 시작해서, 팀파니가 이끌고 첼로가 시작하는 아름다운 멜로디로 전개가 된다. 긴장이 쌓여가다가 악기들이 최초의 주제를 폭포처럼 차례로 연주하면서 해소가 된다. 그 곳에서부터 악장은 몇 번씩 장조와 단조를 오고 가면서 광포한 중간부분을 통과하기 시작한다. 다시 느리고 서정적인 부분으로 돌아온 후에, 곡은 금관과 팀파니가 두드러지는 크로마틱 코다로 끝을 맺는다. 마지막 코드 전의 서두르는 듯한 부분은 보헤미안의 춤곡인 Furiant이다.

연주시간은 36분 정도.


브루흐, 비올라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로망스 (Max Bruch, Romance in F major for Viola and Orchestra, Op. 85)
 
부르흐는 후기 낭만파의 작곡가로 분류되어 지며, 그의 음악은 일반적으로 아름답고, 상상력이 넘치고, 고상하다. 브루흐는 1838년에 쾰른에서 출생했다. 그는 독일, 영국 등에서 지휘, 작곡, 교수로 일하였고 1890년부터 1911년 은퇴할 때까지 베를린 음대에서 작곡교수로 봉직했다.

가장 잘 알려진 그의 작품은 열정적이고 낭만적인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g단조 (1868년작)이며 첼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단악장의 작품 콜니드라이 (1881년작, 첼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히브리 멜로디에 의한 아다지오)도 유명하다. 브루후의 작품들은 독일의 낭만주의 전통에 따라 보수적으로 구성되었고 아름다운 선율을 보여준다. 그는 스스로를 리스트나 바그너와 같은 ‘신음악’ 보다는 브람스와 같은 낭만적 고전주의 학파로 여겼다. 지금은 자주 연주되지 않지만 생전에 그는 주로 합창곡 작곡가로 알려졌었다.
 
브루흐의 이 아름다운 곡, 로망스 Op.85는 1911년에 작곡되었다. 같은 해에 스트라빈스키가 봄의 제전을 위한 첫번째 스케치를 시작하였다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보수적인 전통을 따르는 작곡가인 것을 알 수 있다. 로망스는 파리오페라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인 모리스 비외(Maurice Vieux)에게 헌정되어 졌으나, 1911년 제국주의 베를린의 반프랑스적인 정서로 인하여 이 곡은 베를린 음악학교에서 부르흐와 같이 교수로 재직하던 독일인 바이올리니스트인 빌리 헤스 (Willy Hess)에 의하여 초연되었다. (헤스는 브루흐의 작품을 많이 초연하였었는데,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콘서트 피스 Op.84는 그에게 헌정되어 졌었다.)

작곡자는 이 곡의 악보에 Andante con moto 라고 적었고, Q=69, 72라고 메트로놈의 표시도 적어 넣어놓았다. 단순한 오케스트레이션은 비올라 음역의 그윽함이 두드러지게 한다. 굳건하지만 우아하게 끌어내온 비올라의 음색으로 모든 감정적인 긴장이 섬세하게 그려내어 지며, 솔직하지만 충분한 반주와 완전히 융합되어 진다. 이 곡은 브루흐의 어느 다른 작품들과도 겨룰 수 있을 만한 랩소디적인 테마를 보여주고 있으며, 간절한 열망과 멜랑콜리한 풍부함을 가지고 있다. 투명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매우 개인적이고 낭만적인 러브레터라고 할 수 있다. 곡은 열정적인 웅변으로 시작하여 고요한 엔딩에 이르게 된다.
 
연주시간은 약 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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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부르흐는 후기 낭만파의 작곡가로 분류되어 지며, 그의 음악은 일반적으로 아름답고, 상상력이 넘치고, 고상하게 들리지만, 비평가들은 종종 그를 비주류 작곡가로 분류하곤 한다. 브루흐는 비제가 태어난 해와 같은 1838년에 쾰른에서 출생했다.

브루흐는 어린 아이 시절부터 비상한 음악적 재능을 보여 주며 피아노를 배우고 작곡을 했다. 1852년 그는 교향곡과 현악사중주를 작곡하였는데, 그 현악사중주로 그는 푸랑크푸르트의 모차르트 재단으로 부터 장학금을 수여받을 수 있었다. 1858년에는 쾰른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하면서 첫 오페라인
Scherz, List und Rache를 작곡하였다. 그는 1861년에서 1862년 사이에 독일의 중요한 문화 중심지들을 방문했었다. 1862년부터 64년까지 브루흐는 만하임에 거주하면서 칸타타Frithjof를 작곡했고 청중들을 열광하게 했었다. 만하임의 자리를 떠난 수 브루후는 파리와 브뤼셀을 방문했었고 1865년에는 결국 코블렌츠의 음악감독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1867년, 브루흐는 Sonderhausen에서 궁정의 카펠마이스터가 되었고 1870년까지 머무르게 된다. 그 해, 브루흐는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그의 3번째 오페라인 Hermione를 작곡한다. 이 곡은 1872년 출판되었다. 1873년에서 1878년사이에, 브루흐는 뛰어난 독일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누리면서 본에서 독립적으로 작업을 했다. 1881년, 그러나 그는 Julius Benedict를 이어 영국의 리버풀 필하모닉 소사이어티의 지휘자로서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엄격하지 못했던 연주자들과 잘 지내지 못하였다. 1883년 브루흐는 리버풀을 떠나 브레슬라우 (현재 폴란드의 브로츠와프)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 되었고 그 곳에서 1890년의 시즌까지를 보내게 된다.

그해 가을 브루흐는 베를린 음대의 작곡교수로 임용되었고, 1911년 은퇴할 때까지 그곳에서 일을 하였고 1920년 82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교수로서의 직함을 유지하게 되었다. 레스피기, 본 윌리암스가 그의 학생들이었다.

가장 잘 알려진 그의 작품은 의심할 바 없이 열정적이고 낭만적인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g단조 (1868년작)이다. 이 작품은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부터 몇가지 테크닉을 차용하는데, 이것은 악장간의 연결이나, 그리고 관습적인 관현악 전개와 이전의 협주곡의 완고한 형식으로 부터 벗어나는 점들이다. 많은 비평가들이 언급하듯이 낭만적인 전통의 정점을 대표하는 이 곡의 특징은 단선적인 선율이 쓰였다는 것이다.

두번째로 자주 연주되는 곡은 첼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단악장 작품인 콜니드라이 (첼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히브리 멜로디에 의한 아다지오)이다. 이 사랑스러운 작품은 이질적인 민속적 그룹에서 유래한 선율적인 소재를 이용하는 그의 취향을 잘 보여준다. 이 작품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그를 유태계로 생각하지만, 브루흐가 유태인이라는 증거는 없다. 그는 러시아, 스웨덴, 스코틀랜드, 켈틱 선율들을 이용하여 곡들을 쓰기도 했다. 이들 작품들과 그의 교향곡은 그다지 잘 연주되지는 않으나 가끔은 콘서트홀이나 레코딩에서 다시 살아나기도 하고, 이런 경우에, 청중들은 그 아름다움과 세련된 솜씨에 놀라 매료되곤 한다.

브루흐는 자신의 작품을 고치고 또 고치는 부지런한 작곡가였으며, 그는 3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포함하여 200여곡의 작품을 썼다.

오늘날 브루흐는 바이올린 작품들의 작곡가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는 생전에 현재는 잊혀진 큰 스케일의 합창곡들 - Odysseus, Frithjof 또는 Das Lied von der Glocke 같은- 로 유명했었고 그 같은 곡들이 그에게 생전에 브람스를 능가하는 명성을 가져다 주었었다. 그는 독일의 낭만주의 전통에 따라 보수적으로 그의 작품을 구성했었고 그 스스로를 리스트나 바그너와 같은 "신음악"으로 보기 보다는 브람스와 같은 낭만적 고전주의 학파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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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라는 오케스트라 앙상블에서 뻗어나가는 소리를 얻는데에 따른 문제점을 가지고 있어서 솔로 악기로서 그다지 대중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었다. 몇몇의 비평가들 (알프레드 아인슈타인 같은)에 따르면, 협주곡의 핵심은 비루투오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갈등과 해결을 보여주는데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케스트라에 대해 비올라로 균형을 맞추는 것은 피아노나 또는 바이올린으로 하는 것보다 적합하지 않아 작곡가들은 비올라협주곡을 많이 쓰지 않아왔다. 과거에는 비올리스트들은 순위에서 밀려난 바이올리니스트였고 그렇기 때문에 비올라 솔리스트들은 최근까지 찾아 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윌리엄 왈튼, 랄프 본 윌리암스, 폴 힌데미트는 새롭고 더 능력있는 비올리스트들을 위하여 비올라 솔로 작품을 작곡한 작곡가들이었다. 이들 새로운 연주자들은 또한 원래는 다른 악기들을 위하여 작곡되었던 곡들을 비올라곡으로 편곡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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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브루흐 (1838 - 1920)의 이 아름다운 곡은 1911년에 작곡되었고 같은 해 베를린에서 초연되었다. 작곡자는 이 곡에 Andante con moto 라고 적고, Q=69, 72라고 메트로놈의 표시도 적어 넣어놓았다.

브루흐는 이 사랑스러운 작품을 스트라빈스키가 봄의 제전을 위한 첫번째 스케치를 시작한 것과 동일한 시기에 완성했다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보수적인 작곡가였는지 알 수 있다. 브루흐는 림스키 코르사코프와, 믿을 수 없지만, 브람스 같은 부드러운 음악들도 바이로이트 야수의 새끼악마들로 여겼었다. 그의 우상은 베토벤 - 또는 비창소나타와 바이올린 협주곡의 베토벤이었으며, 후기 현악사중주곡의 미심쩍어하는 모험가인 베토벤은 아니었다. 로망스는 파리 오페라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인 모리스 비외(Maurice Vieux)에게 헌정되어졌다. 그러나, 1911년 제국주의 베를린에서의 성난 반프랑스적인 정서로 말미암아 이 곡은 베를린 음악학교에서 부르흐와 같이 교수로 재직하던 독일인 바이올리니스트인 빌리 헤스 (Willy Hess)에 의하여 초연되었다. 헤스는 브루흐의 작품을 많이 초연하였었고,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콘서트 피스 Op. 84는 그에게 헌정되어 졌었다.

단순한 오케스트레이션은 비올라의 깊은 음역의 그윽함이 로망스에서 두드러지도록 한다. 굳건하지만 우아하게 끌어 내온 음색으로 이 작품은 자제되어지고 모든 감정적인 긴장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작곡가의 솔직하지만 충분한 반주와 완전히 융합되어 진다. 이 곡은 브루흐의 어느 다른 작품들과도 겨룰 수 있을 만한 랩소디적인 테마를 보여주고 있으며, 간절한 열망과 멜랑콜리한 풍부함을 가지고 있다. 투명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매우 개인적이고 낭만적인 러브레터라고 할 수 있다. 곡은 열정적인 웅변으로 시작하여 고요한 엔딩에 이르게 된다.

참고:
http://gbyo.com/behindthemusic.php
http://www.wooster.edu/music/twood/bruchcatalog.html#85
http://www.wooster.edu/music/twood/maxbruch.html
http://wm06.allmusic.com/cg/amg.dll?p=amg&sql=41:7108~T1
http://www.naxos.com/composerinfo/148.htm
http://www.violinman.com/Violin_Family/history/composer/biography/bruch/Bruch.htm
http://en.wikipedia.org/wiki/Max_Bruch
http://www.musicweb-international.com/classrev/2005/July05/Bruch_Fifield_book.htm
http://www.h-net.org/reviews/showrev.cgi?path=208071159992206
http://en.wikipedia.org/wiki/Viola_concer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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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는 오케스트라 연습이나 레슨일지 대신에 드보르작 8번에 관한 이야기를 올려 볼까 한다. 일지에 쓸 말도 없고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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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보르작 교향곡 8번 G장조. 드보르작의 교향곡 중에서 9번 신세계 교향곡에 이어 두번째로 유명하고, 두번째로 많이 연주되는 곡이다.

1884년경에 드보르작은 소품들 뿐만 아니라 d 단조 교향곡의 성공으로 교향곡 작곡가로도 명성을 얻어 국제적으로 유명한 작곡가가 되었다. 성공적인 영국여행을 마치고 귀국하고 나서 그는 그간 꿈꾸어 왔던  것 - 언덕과 수풀에 둘러싸인, 음악실이 있는 소박한 전원주택 - 을 실현시킬 수 있었다. 그가 그의 교향곡 중에서 가장 체코적인 곡인 G장조 교향곡 8번을 작곡한 것은 1889년의 가을, 전원으로 조용히 물러나 있을 때였다.

이 곡은 1889년 8월 26일에서 11월8일까지 보헤미아의 비소카 (Vysoka)에서 두달반 동안에 작곡되어 졌다.  "To the Bohemian Academy of Emperor Franz Joseph for the Encouragement of Arts and Literature, in thanks for my election." 라고 쓰여져서 헌정되어졌다. 작곡자 본인에 의하여 1890년 2월 2일프라하에서 초연되어졌다.

7번 교향곡이 폭풍우가 몰아치는 듯한 낭만적인 작품인데에 반해, 8번은 활기찬 분위기이고, 드보르작이 사랑했던 보헤미아의 민속음악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된 곡이다. 비록 종종 신세계교향곡의 유명세에 가리기도 하지만, 보헤미아의 시골길을 산책하는 듯한 이 작품은, 낙천적인 19세기 후반의 교향곡 작곡의 최고봉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드보르작은 그 전에 얽매여 있던 소나타형식을 벗어나게 되었고, 주제들이 자발적인 흐름을 보이는 듯하는 방식으로 작곡을 하였다.

보통 연주시간은 36분 정도이어서 짧은 교향곡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악기 구성은,
2 플룻 (세컨은 피콜로와 더블링),
2 오보에 (세컨은 잉글리쉬 혼과 더블링),
2 클라리넷,
2 바순,
4 혼,
2 트럼펫,
2 트럼본,
튜바,
팀파니,

 
오보에는 하나로 막는다 쳐도, 트럼펫과 트럼본, 튜바, 팀파니는 구해야 곡을 연주할 수 있는 것인가...;;

드보르작은 프라하 교외의 한 마을인 Nelahozeves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마추어 음악가였으며, 여관과 정육점을 했는데, 드보르작은 3년간 그 일을 배우기도 했다. 삼촌의 후원아래, 소년은 음악을 배울 수 있었고, 1857년에 프라하 오르간 학교에 입학했다. 음악가로서 그는 새로이 문을 연 Prague  Provisional Theatre의 오케스트라에서 스메타나와 바그너의 지휘하에 비올라를 연주하는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그의 첫 교향곡은 1865년에 작곡되어 졌는데, 그의 음악은 영향력있는 비엔나의 비평가인 한슬릭(Hanslick), 그리고 브람스의 눈에 띄게 되었고, 그 이후로 그의 명성은 서서히 전 유럽으로 퍼졌으며 결국에는 미국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드보로작은 영국을 수차례 방문했다. 1885년에 런던에서 7번 교향곡의 성곡적인 초연이 있었을 때, 드보르작은 베를린의 출판인인 Simrock과 문제가 있었고, 그리하여 그는 그의 곡들 상당수를 런던의 Novellos에게 보냈는데, 거기에는 이후에 "The English"라는 부제가 달리게 되는 8번 교향곡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8번의 부제가 The English라는 것은 처음 듣는 정보이다....)

사실 곡의 분위기나 주제는 영국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고, 이 이름은 사실 독일 출판업자인 짐록 (Simrock)과의 분쟁때문에 얻어지게 되었다. 작곡가의 큰 스케일의 곡에는 흥미가 없었고 소품들을 출판하여 이윤을 많이 얻고자 했던 이 출판업자는, 작곡가에게 교향곡의 대가로 매우 적은 금액을 제시했다. 그 결과로 드보르작은 짐록과의 배타적인 계약을 종결하고 영국회사인 노벨로(Novello)와 계약을 맺어 이 곡을 출판하게 되었다. 드보르작은 영국에서 매우 유명했었고 1891년 6월에는 캠브리지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도 받았었는데, 그는 논문을 제출하는 대신, 학위수여식에서 G장조 교향곡을 지휘했다. 그는 또한 1893년 시카고의 세계 박람회에서 체코의 날에 이 교향곡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드보르작은 기차매니아였던 것으로 유명하고 이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들이 잔뜩있다. 아름다운 곡을 썼던 위대한 작곡가가 기차에 관한한 거의 오타쿠적인 모습을 보여줬었다는 것이 상당히 재미있다.

악장별 설명:

1악장: Allegro con brio (G major) –
팀파티가 자유롭게 사용되며, 힘차고 열정적인 전개가 이루어진다. 첼로, 혼, 클라리넷이 장엄하고 서정적인 G단조의 주제로 시작되고, 새가 지저귀는 듯한 플룻의 멜로디로 이어진다. 곡은 힘과 빛남을 더해가다가 행진곡풍의 G장조 선율이 나오며 율동적인 목관의 2주제가 나타난다.

2악장: Adagio (C minor) –
아다지오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꽤 속도가 있다. 현에 의한 C단조의 셋잇단음표의 업비트로 시작. 만족감으로 가득차 있으며, 전원생활을 그려보여 주고 새들의 노랫소리로 가득차 있으며 마을악단도 등장한다.

3악장: Allegretto grazioso – Molto vivace (G minor) –
3악장 대부분은 3/8박자의 춤곡이다. 끝부분에서 박자는 2/4로 변하고, 음악은 2악장과 비슷한 방식으로 속삭이면서 끝나게 된다. 열정적인 스케르쪼 (또는 심지어 체코의 춤곡 (furiant))라기 보다는 선율적인 매력으로 가득찬 우아한 왈츠이다. 중간의 시골풍의 춤곡으로의 갑작스런 변화와 두배로 빨라진, 끝부분으로 달려가는 코다는 사랑받는 체코의 춤곡인 Dumka를 연상시킨다. 중간에 나오는 주제는 작곡자가 "고집센 농부 (Pig- headed Peasants)"라는 초기의 오페라에서 사용한 것이었다고 한다. 

4악장: Allegro ma non troppo (G major) –
이 피날레는 가장 휘몰아치는 듯한 악장이다. 팡파레의 활발한 2/4로 시작해서, 팀파니가 이끌고 첼로가 시작하는 아름다운 멜로디로 전개가 된다. 긴장이 쌓여가다가 결국에는 곡이 시작하고 나서 약 2분 정도 전에서 악기들이 최초의 주제를 폭포처럼 차례로 연주하면서 해소가 된다. 그 곳에서부터 악장은 몇 번씩 장조와 단조를 오고 가면서 광포한 중간부분을 통과하기 시작한다. 다시 느리고 서정적인 부분으로 돌아온 후에, 곡은 금관과 팀파니가 두드러지는 크로마틱 코다로 끝을 맺는다. 마지막 코드 전의 서두르는 듯한 부분은 보헤미안의 춤곡인 Furiant라고 한다.

참고: http://www.bhso.org.uk/repert-163-Dvorak-Symphony-no-8-in-G-major.htm
http://www.andrews.edu/~mack/pnotes/feb1399.html

스코어: http://www.dlib.indiana.edu/variations/scores/adr4498/large/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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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시기는 1834-1835년. 바이올리니스트인 카롤 리핀스키 (Karol Lipinski)에게 헌정되었다. Scènes mignonnes sur quatre notes (Little Scenes on Four Notes)라는 부제가 달려 있고, 각각의 모티프에 의한 22개의 피아노 모음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부분은 아래와 같은 일련의 음들이 둘 다 혹은 하나씩 사용 되어져 있다.

A, E-flat, C, B; 독일어로는 A-S-C-H
A-flat, C, B; 독일어로는  As-C-H.

위의 철자는 슈만의 그 당시 약혼녀였던 Ernestine von Fricken이 태어난 고장의 독일이름이다. (Asch는 현재는 체코공화국) 이것들은 또한 슈만 자신의 이름에 있는 음 이름들이기도 하다. Schumann

Carnaval은 멋진, 화음으로 이루어진 패시지와 리듬의 변화로 유명하다. 작품은 모두 22개의 부분으로 되어 있으나, 20개만 번호가 붙여져 있고, "Sphinxes"와 "Intermezzo: Paganini" 는 작곡자에 의한 번호는 붙여져 있지 않다.

1. Préambule (A-flat)
2. Pierrot (E-flat)
3. Arlequin (B-flat)
4. Valse noble (B-flat)
5. Eusebius (E-flat; depicting the composer's calm, deliberate side)
6. Florestan (G minor; depicting the composer's fiery impetuous side)
7. Coquette (B-flat; depticting the flirtatious servant from
Friedrich Wieck's house who may have given him syphilis)
8. Réplique (G minor)
Sphinxes
9. Papillons (B-flat)
10. A.S.C.H. - S.C.H.A: Lettres Dansantes (but despite the title, the pattern used is As.C.H; E-flat)
11. Chiarina (C minor; depicting
Clara Wieck)
12. Chopin (A-flat)
13. Estrella (F minor; depicting Ernestine von Fricken)
14. Reconnaissance (A-flat)
15. Pantalon et Colombine (F minor)
16. Valse Allemande (A-flat; German waltz)
Intermezzo: Paganini (F minor; with a reprise of the Valse Allemande)
17. Aveu (F minor)
18. Promenade (D-flat)
19. Pause (A-flat; leading directly without pause into ...
20. Marche des "Davidsbündler" contre les Philistins (A-flat, in which quotations from a number of the previous sections fleetingly reappear).


악보: http://imslp.ca/images/imslp.ca/1/1b/Schumann_-_Carnaval,_Op_9.pdf
http://www.pianopedia.com/w_299_schumann.aspx
해설 및 듣기: http://www.piano-net.com/schumann.htm




Posted by 슈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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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provising Mozart by Robert Levin

클래식 음악가들은 매우 전문화되어져 버렸다. 오늘날 연주자들의 대부분은 하루에 수시간씩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쓰여진 텍스트를 배우고 완벽하게 익히기 위하여 고통스럽게 연습한다. 음악을 재생산하는 데에 매우 재능이 있으나, 그들은 종종 음악을 창조해내는 훈련은 거의 또는 전혀 받지 못한다. 출구를 못 찾거나 대사를 잊어버린 상황에 직면한 배우는 그 갭을 메울 대사를 그 자리에서 생각해 내면서 상황을 모면하곤 한다. 기억력의 실수, 갑작스런 발음이나 사투리의 대조는 등장인물과 배우 사이의 동일성에 대한 환상을 산산조각 내며,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상황이며, 그것이 흉내내는 인생보다 순간적으로는 더 강렬해 보이는 연극의 연금술이 아니라는 것을 뼈져리게 알려준다. 운율이 있는 고전시가에서 애드립의 대사를 읊는 것이 어렵지만, 모든 배우들에게 그의 모국어로 즉흥적으로 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은 일상화된 경험이다. 이것은 음악가들에게는 별로 그렇지가 못하다; 그리고 위대한 작곡가의 개인적인 언어들 안에서 그런 발명의 작업을 수행하는 것은 작곡, 문법, 문장론, 수사학 그리고 음악 (이론)의 구조에 대한 집중적인 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연주가들에게는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겁나는 일이다.

건반 앞에 앉은 어린 모차르트

18세기에는 모든 작곡가들은 연주자들이었고 사실상 모든 연주자들은 작곡을 했다. 더구나, 실제로 연주되는 모든 음악은 새로운 것이었다. 오늘날의 대중음악과 예술음악과의 분리는 그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각각은 시대의 특징에 맞는 자연스러운 언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즉흥연주는 비예술 음악에서는 필수적이다. 모든 문화권의 음악에서 존재하고, 재즈에서는 중심적인 과제이다. 루이 암스트롱, 콜맨 호킨스, 아트 테이텀, 마일스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 (과거의 대가들의 임의적인 샘플링임)의 천재성은 환상적인 상상의 자유로은 비행을 담은 음반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모차르트의 연주들은 즉흥연주가, 피아니스트, 작곡가 (이 것은 그의 동시대인들이 그의 재능에 대해 평가를 했던 순서이다)로서의 그의 재능을 보여주기 위하여 디자인된 것이었다. 그의 피아노 협주곡은 소위 카덴차와 도입부 (전주)라고 불리우는 - 그가 충동적으로 대담한 연주를 하기 위하여 설정한 - 인위적인 공백들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모차르트는 많은 패시지들을 스케치나 개략적인 형태로 남겨두었는데, 실연에서 연주자들이 각각의 연주에서 새로운 특정한 표현적인 내용을 가지고 채우도록 연주자들의 의지에 맡겨 놓은 것이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 1악장의 자필 악보. 이 페이지 마지막의 코드는 모차르트가 즉흥연주를 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공백 (contrived chasms)' 중의 하나이다. 

20세기에 음악가들은 충실하게 작곡자들이 써놓은 성서 (악보)를 지켜서 연주하도록 훈련 받아왔다. 만약 연주자의 의지가 나타나면, 작곡된 곡을 단순히 자기 자신을 과장하여 드러내려는 도구로만 사용하기 위하여 곡의 지시들을 무시하고 눈길을 끌게하려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졌다. 고전음악의 연주자와 청중 각각은 작곡가들이 이 들 작품을 썼던 것보다 수백, 수천 배는 더 많이 표준화된 레퍼토리를 경험해왔고, 작품이 최초에 연주되었을 때의 효과의 참신함을 그들에게 다시 느끼게 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 졌다. 오늘날 표준화된 많은 연주들은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모차르트의 경우에서 즉흥연주는 전체적인 작품의 성격을 내부에서부터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필요한데, 쓰여져 있는 텍스트를 충동적으로 꾸며서 연주하는 것은 음악적인 표면과 어울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꾸밈음과 즉흥적인 부분들은 작품의 개성을 묘사하는 것을 좀 더 강조하여야 하며, 단지 평범하고 진부한 관습 (여기서는 트릴, 저기서는 curlicue)을 연속으로 넣어 놓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모차르트와 그의 동료들로로부터 그 음악의 장식된 버전이 분명하게 그가 기대했던 만큼의 장식의 종류와 양을 보여주고 있는 상당수의 예를 가지고 있다. 이런 증거로 비추어 볼 때, 오늘날의 연주 중 많은 수가 받아 들일 수 없을 만큼 불완전하다고 모차르트가 생각할 지도 모를 만한 방식으로 연주되는 패시지를 포함하고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연주가 기대하는 바처럼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가 아니라 오히려 '..... 그것이 문제가 아니로다'가 된다면, 그 연주가 얼마나 시적이고, 얼마나 음율적으로 매혹적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6번 ('대관')의 자필 악보에서 느린 악장의 시작 부분. 피아노 부분의 오른 손 부분만이 쓰여져 있다 — 모차르트는 장식부분 뿐만아니라 왼손도 즉흥연주 하였을 것이다.

오르가니스트는 제외하고, 고전 음악 연주자들은 즉흥연주를 할 수 있는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하여도 거의 다 더이상 즉흥연주를 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연주자들은, 경쟁과 레코딩의 가혹한 상황 하에서, 일관성과 정확성에 어떠한 위협을 가하게 되는 위험을 회피하는 법을 일찌기 배우게 된다.  즉흥연주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으나, 위험을 피하는 것보다 더 음악의 드라마틱하고 감정적인 메시지를 파괴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즉흥연주도 아무 것도 없는 것 보다는 낫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발음이 어떤 곡의 언어에 특징을 나타내어 주는 지는 분명히 중요하다. 영화 제작자가 역사적으로 정확한 위치에서 그 시대의 소품들과 복장을 입고 그 시대의 언어로 대화를 하는 것을 수백만 번을 찍었으나, 모든 장면에서 그 장소와는 맞지 않는 음악을 사용하는 것에 만족한다면 얼마나 이상하겠는가. 크리스토퍼 말로우이의 희곡이 시골 알라바마의 사투리와 억양이 갑작스럽게 삽입되면서 공연되면 청중들은 그로테스크하거나, 코믹하다고 인식하게 될 것이지만, 우리는 그런 언어적인 부조화를 음악에 있어서는 주저없이 인정을 하곤 한다. 만약 모차르트의 언어가 말로우이의 것 만큼이나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다면, 각각의 연주의 부분으로서 그것을 새롭게 고안해 내기 위하여, 그 곡의 내부로부터 배우는데에 시간을 쓰는 것은 분명히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하는 모든 모차르트 연주의 목적이며, 특히 크리스토퍼 호그우드와 the Academy of Ancient Music와 같이 하는 이 협주곡 사이클의 레코딩에서의 목적이기도 하다.

출처: http://www.aam.co.uk/features/9705.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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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의 영감 L'estro Armonico op. 3

1711년 작곡.

(바흐는 훗날 이 협주곡을 하프시코드 솔로 (no.9, no.12), 오르간 솔로 (no.8, no.11) 그리고 4대의 하프시코드와 현을 위한 곡으로 (no.10)으로 만들기도 했다.)

L'Estro Armonico, Op.3, Concerto No. 1 in D major for four violins and strings, RV 549:
1.
Allegro
2. Largo e
spiccato
3. Allegro

L’Estro Armonico, Op.3, Concerto No. 2 in G minor for two violins, cello and strings, RV 578:
1. Adagio e spiccato
2. Allegro
3. Larghetto
4. Allegro

L'Estro Armonico, Op. 3, Concerto No. 3 in G major for violin and strings, RV 310:
1. Allegro
2. Largo
3. Allegro

L’Estro Armonico, Op.3, Concerto No. 4 in E minor for four violins and strings, RV 550:
1. Andante
2. Allegro assai
3. Adagio
4. Allegro

L'Estro Armonico, Op. 3, Concerto No. 5 in A minor for two violins and strings, RV 519:
1. Allegro
2. Largo
3. Allegro

L’Estro Armonico, Op.3, Concerto No. 6 in A minor for violin and strings, RV 356:
1. Allegro
2. Largo
3. Presto

L’Estro Armonico, Op.3, Concerto No. 7 in F major for four violins, cello and strings, RV 567:
1. Andante
2. Adagio
3. Allegro - Adagio
4. Allegro

L’Estro Armonico, Op.3, Concerto No. 8 in A minor for two violins and strings, RV 522:
1. Allegro
2. Larghetto e spiritoso
3. Allegro

L'Estro Armonico, Op. 3, Concerto No. 9 in D major for violin and strings, RV 230:
1. Allegro
2. Larghetto
3. Allegro

L’Estro Armonico, Op.3, Concerto No. 10 in B minor for four violins, cello and strings, RV 580:
1. Allegro
2. Largo - Larghetto
3. Allegro

L'Estro Armonico, Op. 3, Concerto No. 11 in D minor for two violins, cello and strings, RV 565:
1. Allegro
2. Adagio e spiccato
3. Allegro
4. Largo e spiccato
5. Allegro

L'Estro Armonico, Op. 3, Concerto No. 12 in E major for violin and strings, RV 265:
1. Allegro
2. Largo e spiccato
3. Allegro

전곡 악보 모음: http://scores.ccarh.org/vivaldi/o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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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그우드의 이 글은 번역이 쉽지가 않다. 영국 사람이 영어로 쓴 글인데 왜 이리 어려운지... 그래서 아래 번역은 정말 매끄럽게 만들어지지가 않았다.. 다시 영어를 읽어 보고 고치고 싶은데... 읽어도 정확하게 어떤 의미로 그렇게 썼는지가 잘 와닿지가 않는다..ㅠㅠ 그래도 비발디의 조화의 영감에 대한 내용, 연주방법등에 대한 약간의 정보는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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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tro Armonico는 번역하기가 곤란한 제목이다; 조화의 영감이나 음악의 고양은, 18세기의 가장 통찰력있는 출판가였던, Estienne Roger가 이 1711년에 이 12개의 협주곡 모음을 발간하도록 만들었던 천재와 상상력의 결합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이 곡들 이전에는, 비발디의 작품 중 인쇄본이라고는 베니스에서 출판된 소나타 두 세트가 있었을 뿐이었다: 1705년의 12개의 트리오 소나타 (Opus 1)와 1709년의 12개의 솔로 소나타 (Opus 2), 두 곡은 그의 Conservatorio  dell' Ospedale della Pietà에서의 바이올린 교사로 활동하면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 고아원은 베니스의 4군데의 유명한 기관들 가운데 하나였고, 어린 소녀들에게 음악적인 학습을 시켜주었는데, 비발디는 일요일이나 축제일마다 연주회를 지휘하였고, 이로 인하여 매우 빠르게 도시 밖의 멀리에서 온 방문자들에게서 명성을 얻었다. "The transcendant music은 병원 소속이었다. 4개가 존재하는데, 모두 사생아들이나 고아들, 부모가 기를 수 었는 상황에 있는 아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국가가 비용대어 양육되어졌고 음악분야에서는 탁월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았다. 그들은 천사와 같이 노래하고, 바이올린, 플룻, 오르간, 오보에, 첼로, 바순을 연주했다; 간단히 말해, 그들을 놀라게 할 만한 큰 악기들은 없었다... 맹세컨대, 하얀 제복을 입은 상당히 어린 수녀가 귀에 석류꽃봉오리 가지를 꽂고,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우아함과 정확함으로 박자를 맞추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 더 즐거운 것은 없다." (Charles de Brosses, Lettres familières sur l'Italie)

이것은 작품번호 3번의 출판이었고 비발디가 유럽에서 명성을 얻게끔 하였으며, 이 모음곡은 곧 John Walsh에 의해서 런던에서도 출간되었고 (Vivaldi' s most Celebrated Concertos) Le Clerce Cadet에 의하여 파리에서도 Les Troharnonico라는 약간 괴이한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Quantz는 1714년에 드레스덴 근방의 피르나 (Pirna)에서 처음으로 이 곡을 들었다: "그 당시에는 완전히 새로왔던 이런 종류의 음악은 나에게 적지 않은 인상을 주었다. 나는 이런 곡들을 꽤 많이 모으려고 노력했고, 비발디의 놀라운 ritornelli는 훗날 나에게 훌륭한 모델이 되어 주었다."

바흐가 비발디의 협주곡으로 부터 작곡한 10개의 키보드를 위한 곡들 중에서, 6곡은 Opus 3으로부터 온 것이나, 사실은 인쇄된 판본에서 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 작품 중 몇몇은 手稿 형태로 이미 수년간 회람되어졌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들 중 6개는 현재에도 분리된 모음곡으로 널리 분포되어 전해지고 있다 (3곡은 드레스덴에, 나머지는 각각 비엔나, 나폴리 그리고 슈베린(Schwerin)에 있음). 인쇄된 악보의 복사본을 만들 이유도 이익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 작품들이 1700년경까지 알려져 있었고 널리 배포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비발디가 Roger를 위하여 엮었던 모음곡은 스타일과 스코어링에서의 다양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디자인 된 것이다. 10년 이상 동안의 협주곡 형태에 대한 실험에 의하여 그는 2개의 polysectional 협주곡 (IV과 VII)같은 오래된, 코렐리적인 방식의 곡들을 삽입할 수 있었고, 토렐리의 작품번호 8번에서의 'due violini che concertano soli'을 협주곡의 모델로 삼기도 했으며, 또는 가장 발전된 방식으로, 이전에는 오페라하우스에서만 사용되던 서정주의와 드라마를 비발디가 분명히 자신을 주인공으로 여겼을 솔로 협주곡들에 도입하기도 하였다.

이 모음곡은 시대순으로 엮여 있지는 않았으나, 이런 복잡한 편집은 모음곡이 전체적으로 연주되는 경우에 최대한의 다양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비발디가 마지막에 약간 곡을 다시 쓰게 만들었던 것 같다). 협주곡들은 3곡씩 4개의 그룹으로 되어 있고, 각각의 그룹은 솔로, 2중주, 4중주의 협주곡을 포함하고 있다. 게다가, 비발디는 조별로 쌍을 지었는데, 장조로 되어 있는 각 협주곡 뒤에는 단조 협주곡이 이어지는데, 마지막 한 쌍은 예외여서 이 시스템이 뒤집혀져 전체 곡이 장조로 끝나게 되어 있다. 이것은 전형적인 이탈리아식 편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알비노니(Opp. 7 and 9)와 토렐리(Opp. 5 and 8)도 이런 식의 한쌍으로 이루어지는 시스템을 사용했었다.

4명의 솔로이스트들이 이 복잡한 편집에 만족하도록 하기 위하여 비발디는 협주곡들이 충분히 많아야 했기 때문에 곡을 다시 쓰는 일은 필수적이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이것은 VII번에서 가장 명백하다. VII번은 원래 두대의 바이올린과 콘티뉴오를 위한 보통의 콘체르티노로 협주곡이 시작되었었다는 표시를 보여준다; 마지막 알레그로는 사실 원래의 그룹 (비록 콘티뉴오 라인이 현재는 '첼로 오블리가또'가 되기는 했지만)을 보여주는 것이고, 다른 곳에서 솔로파트가 두개인것은 단순한 연장과 반복에 의하여 부풀려졌다. 몇개의 다른 협주곡에서, 원래 콘티뉴오 라인의 존재를 추측해 보는 것이 가능하며, 가끔 불필요한 '첼로 오블리가또'는 비발디가 하나의 콘티뉴오 파트를 가지고 이 모음곡을 만들어 내려고 약간 불편한 타협을 했었다는 점을 숨기려는 것처럼 보인다.

협주곡들은 8개의 파트보로 발간되어졌다 (4 바이올린, 2 비올라, 첼로 그리고 '비올론 에 쳄발로'). 이것이 교대로 하는 연주를 의미한다는 주장이 자주 있었으나, 이는 그 작품들 자체와 모순되어 진다; 필요한 유일한 교송 (교대로 하는 연주)는 콘체르티노와 투띠 (VII에서 처럼)간에 있거나, I, IV, X에서 공간적인 분리를 허락하기에는 스타일이 너무나 변덕스러워 지게 되는 부분에서, 솔로이스트들간에 나타난다. 두 대의 비올라 간에는 교송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간단한 대답이 정답이 될 것이다: 8개의 파트보는 비발디가 요구하는 다양한 스코어링을 포함하면서 최대한 4대의 바이올린과 콘티뉴오로부터 때때로 분리되어 연주되어지는 첼로파트를 넣어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다. 비발디의 가정은 물론, 각각의 파트가 한 명의 연주자에 의하여 연주될 것이고, 파트들은 아주 잘 조직되어 있어서 솔로 협주곡에서는 이것은 3 바이올린의 뚜띠가 될 것이고; 두대를 위한 협주곡에서는 각 독주자들이 리토르넬리에서 둘이 될 것이고; 4명의 독주자들이 함께 연주할 때에는, '뚜띠'와 '솔로'의 표시가 지침이 될 것이다. 이것은 바흐가 브란덴부르크협주곡의 연주를 위하여 했던 가정과 동일한 것인데, 브란덴부르크 III번은 아마 비발디의 여러 현악기 독주자들을 위한 스코어링 방법에 가장 가까운 독일제 파생품일 것이다. 현재 녹음에서, 첫째로 독주 현악기들이 전체적으로 사용되는데, 연주자들은 왼쪽으로부터 제1, 제2 바이올린이 배치되며, 제3, 제4 바이올린은 중앙의 콘티뉴오 섹션의 오른쪽에 배치되는데, 2명의 독주자가 교송을 하게되는 'con due violini obligati' 협주곡들만이 예외이다.

18세기의 협주곡 연주에서 즉흥연주의 대부분은 - 특히, 솔로파트의 'gracing' (카덴차)과 콘티뉴오의 화성전개에서 - 현대의 연주자들에게 많은 문제를 남긴다. 우리가 비발디의 연주에 관하여 가지고 있는 약간의 증거에 의하면, 그는 독주자가 장식음을 넣어 연주하는 것을 요구할 때는 그것을 표시하였고 (V, VI, IX의 과도하게 느린 악장에서 보여지듯이) 또는 카덴차의 순간적인 정지를 표시하려고 코로나 모양을 사용하였었다. 다른 곳에서, Quantz의 충고가 가장 잘 맞는 것으로 보여진다:"좀처럼 싫증나지 않는 서정적인 부분을 다양하게 만드는 것은 피해야하고, 선율 그 자체로 충분히 즐거운 멋진 패시지도 유사하다. 별다른 감동이 없는 부분만이 다양하게 표현되어야 한다." 그리고, IX의 느린 악장에 가장 적합한 이야기를 하는데: "시실리아노는 트릴를 되도록 넣지 않고 너무 느리지도 않게 아주 단순하게 연주되어야 한다. 이것은 시실리안 양치기들의 춤을 모방한 것이기 때문에, 몇 개의 appogiatura (비화성적 앞꾸밈음)를 제외하고는 너무 많은 다른 장식음을 여기에는 넣어서는 안된다."

즉흥적 콘티뉴오 부분에 관하여, 비발디 자신에 의하여 쓰여진 화성 전개의 두 부분은 이탈리아인들이 콘티뉴오를 독주자에 대한 경쟁자로 앞에 나타세우기 보다는, 화음을 뒷받침해주는 배경으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견해를 확인해 준다.

코렐리의 작품 IV를 따라 만들어졌고, 그 세기를 통틀어 가장 인기있는 협주곡의 모음이었던 L' EstroArmonico 를 보면서, Quantz, Marcello, Mattheson같은 사람들이 다른 작곡가들을 평가하고 충고해 주던 표준을 L' EstroArmonico이 어떤 식으로 보여주고 있는지 보는 것은 도움이 된다. Quantz는 그의 Versuch einer Anweisung die flöte Traversiere zu spielen에서, 찾아야 할 것은 '모든 부분이 잘 다듬어져 있는 장대한 리토르넬로 시작부분' (예를 들어 II, IV, VIII), 또는 아마도 '고결하고 위엄있게 연주되는 유니즌과 다른 종류의 선율의 음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을 열정과 활기' (V또는 I의 라르고) 라고 쓰고 있다. "협주부분에서 모방들의 절묘한 조합"은 첫번째 악장에서 4명의 독주자들에 의해 가장 잘 보여진다. 리토르넬로와 서정적인 독주의 대조는 추천할만하다; 라르고 악장을 위한 비발디의 해결책은 계속되는 유니즌의 뚜띠 (I에서처럼), 지속적인 하모니 (VI), 부드럽게 반복되는 코드 (V, XI) 그리고 베이스 라인을 완전히 없애버림으로 자주 나타나는 질감의 변화이다. 마지막 악장은 "성격과 박자에서 앞서의 두 악장과 달라야 한다... 첫 악장이 진지했던 만큼 유머러스하고 즐거워야 한다"; 화려한 피날레에 대한 흥미로운 대안은 VII번의 마지막 악장에서 볼 수 있는데, 전통적으로 궁정 춤곡 모음곡으로 끝나는 프랑스의 발레 스타일의 미뉴에트이다 (브란덴부르크 1번의 마지막 미뉴에트와 트리오와 비교해 보라). 이런 맥락에서, 이탈리아인들은 과거에 생각되던 것 보다 더 stile alla Francese를 의식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고, 비발디 협주곡의 몇몇 패시지들은 프랑스식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18세기 평론가들을 놀라게했던 Opus 3의 이들 협주곡들은 우리에게 같은 효과를 주기 때문에 거의 주석이 필요하지 않다: II의 이론적인 도입부분 (사계의 '겨울' 시작 부분과 현저하게 유사하다), 또는 X의 라르게토에서, 4개의 독특한 아르페지오의 방법이 동시에 지정되어 있는 4명의 독주자들을 위한 스코어링의 뛰어난 패시지 같은 효과. 전체의 곡 세트에서, 가장 평이 많고, 모방되기도 했었던 곡은 11번째 협주곡이다. 도입부의 드라마는 다시 없을 만한 것이나, 이어지는 푸가 주제는 더 훌륭하여 많은 사람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던 것이다.  '변덕스런 성미를 가진 ' 비발디가 이런 대위법적인 기술을 보여주었어야만 했다라는 점은 주목받아왔다. 옥스포드의 음악교수인, William Hayes는 "그의 첫 12개 협주곡, Opus 3, 중 11번째 협주곡에서 그는 우리에게 그가 충실하게 작곡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예를 보여준다... 다른 곡에서 그는 빛나는 상상력과 실천력을 사용하였고, 이런 점에서 그는 그 이전의 어느 누구보다 앞서 있었으며, Geminiani 조차도 그를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푸가의 주제가 잘 만들어졌으며, 잘 유지되었고, 대가다운 장치들을 넣어 전체가 적절하게 변주되어지고 하모니는 풍부하고 완전하게 되어 있는 것은 바로 이 11번 협주곡이다." (Remarks on Mr Avison's Essay on Musical Expression에서)

CHRISTOPHER HOGWOOD

Title Page of L'Estro Armonico

Antonio Vival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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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세분이 함께한 연주회 녹음 음반의 마지막곡인 앵콜곡입니다. 재밌는 곡이네요^^
(나오는 멜로디가 어떤 곡들인지 찾아보시는 재미가 있지요..)
 
1998년 5월 일본 도쿄의 Sumida Triphony Hall에서의 연주 실황입니다.
 
 
아래는 이 음반의 리뷰에서 발췌..
 

Lastly, one of the real treats in this recording must be the encore piece, which apparently drove the crowd wild in Japan. I don't know if there was ever a recording of Kiesewetter's "Tango Pathetique" but I'm sure glad I heard it here. This funny little piece quotes memorable themes from Tchaikovsky violin concerto, 'rococo' variations and Sixth Symphony in a quirky tango. 'Nuff said, hearing the 3 have fun with this is almost worth the price of the recording!

Posted by 슈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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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 Notes

Variations on a Theme of Tchaikovsky, Op. 35a

Anton Stepanovich Arensky (1861-1906)


The life of the Russian composer, pianist and conductor, Anton Arensky, almost reads like a Dostoyevski novel. Born to musical parents who gave him his first music lessons, he was already composing piano pieces and some songs by the age of nine. After taking private lessons he was admitted to the St. Petersburg Conservatory in 1879. There he studied with Rimsky-Korsakov who, while Arensky was still a student, entrusted him with a share in preparing the vocal score of the opera The Snow Maiden. Arensky graduated with the gold medal after only three years and was immediately given an appointment as a professor of harmony and counterpoint at the Moscow Conservatory. There he came under the influence of Tchaikovsky, who took the young composer under his wing and tried to promote his music, although he was as concerned about the heavy drinking and gambling engaged in by his student, a fact already noted by Rimsky-Korsakov. Tchaikovsky is said to have remarked: "Arensky is a man of remarkable gifts, but morbidly nervous and lacking in firmness and altogether a strange man."


러시아의 작곡가, 피아니스트, 지휘자인 안톤 아렌스키의 삶은 마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과도 같다. 그는, 음악가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처음 음악수업을 받았고, 9살에 이미 피아노곡들과 몇몇 노래들을 작곡하였다. 그는 개인레슨을 받다가, 1879년 성페테르스부르크 음악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아렌스키는 림스키 코르사코흐와 같이 공부하였는데, 그는 아렌스키가 아직 학생이었을때 오페라 "눈아가씨"의 보칼 부분을 같이 작업할 만큼 그를 신뢰했었다. 아렌스키는 3년만에 금메달을 받으며 졸업을 했고 곧 모스크바 콘서바토리의 화성학과 대위법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차이코프스키의 영향을 받게되는데, 차이코프스키는 이 젊은 작곡가를 자기 밑에 두고 그의 음악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차이코스스키는, 일찌기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지적했던, 아렌스키의 폭음과 도벽에 대해서 걱정했다. 차이코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고 한다: "아렌스키는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지만, 병적으로 신경이 예민하고 심지가 굳지도 못하여, 전체적으로 이상한 사람이다."


In 1894 Balakirev recommended Arensky to be his successor for the directorship of the imperial chapel in St. Petersburg. The following year Arensky resigned from his Moscow post to assume the directorship. Then, in 1901, Arensky gave up his post with the imperial chapel and with a rather meager pension ostensibly devoted the rest of his career to composition. For a period of time he gave very successful concerts both as pianist and conductor in Russia and abroad. However, despite his brilliant talent that was recognized everywhere, he became increasingly disorganized as his personality disintegrated. His chronic alcohol addiction began to take its toll on his health, and he succumbed to tuberculosis, dying at age 45 in a Finnish sanatorium.


1894년 발라키레프는 아렌스키를 본인의 성 페테르스부르크의 제국성당의 음악감독 자리를 물려줄 후계자로 추천했다. 다음해에 아렌스키는 모스크바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음악감독직을 수락했다. 1901년에 아렌스키는 제국성당 자리도 사임하고, 좀 불충분한 연금소득으로 살아가면서 그의 남은 생애를 작곡에 몰두하면서 살게 된다. 그동안, 그는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로서 러시아 국내와 해외에서 아주 성공적인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그러나, 널리 알려진 그의 빛나는 재능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격은 붕괴되어갔고, 생활도 무너져갔다. 만성적인 알콜중독으로 그의 건강은 상하기 시작했다. 그는 결핵으로 쓰러졌고, 45세에 핀란드의 요양소에서 사망했다.


Arensky is considered to be one of the most eclectic Russian composers of his generation. Among his works are three operas, two symphonies, four suites for two pianos, songs and music set to Pushkin poems, a ballet, a piano concerto, chamber pieces and works for solo piano. Yet Arensky is remembered chiefly for his having taught Rachmaninoff, Scriabin and Glière as well as for his popular Piano Trio No. 1 in D minor.


아렌스키는 그 시대에서 가장 절충주의적인 러시아 작곡가들 중 하나로 생각되어진다. 그의 작품들은, 3개의 오페라와, 2개의 교향곡, 4개의 두대의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 그리고 푸쉬킨시에 붙인 음악, 발레곡, 피아노협주곡, 실내악작품들, 피아노 독주곡들이다. 그러나, 아렌스키는 주로, 라흐마니노프, 스크리아빈, 글리에르를 가르쳤던 사실과 그의 유명한 피아노 삼중주 1번 d 단조로 기억되고 있다.


The Variations on a Theme by Tchaikovsky has an interesting history. Tchaikovsky, whom Arensky so intensely admired, had written a lengthy elegiac piano trio in 1881 in memory of his friend Nikolai Rubinstein, and in it incorporated a set of variations. When Tchaikovsky died in 1893, presumably as the result of suicide, Arensky, to express his grief, composed an elegiac String Quartet in A minor, Op. 35 that he dedicated to Tchaikovsky. The A-minor quartet has the unusual combination of violin, viola and two cellos, although a later version has been arranged for the traditional string quartet. The second movement of this quartet consists of a set of variations based on Tchaikovsky's Children's Songs, Op. 54, No. 5, "Legend: When Jesus Christ was but a little child." This set of variations became such an immediate success that Arensky himself published it as a separate work for the standard string quartet ensemble as well as for string orchestra. It is in the latter form, as will be played in tonight's concert, that the "Arensky Variations" has become established in the concert repertoire as the composer's most lasting orchestral work, long after his other major works have been forgotten.


차이코프스키 주제에 의한 변주곡은 흥미로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아렌스키가 상당히 존경했던 차이코프스키는 1881년 친구인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을 추모하는 긴 슬픈 가락의 피아노 삼중주를 작곡하였고 이곡에는 변주 부분이 들어 있었다. 차이코프스키가 1893년 자살로 추정되는 이유로 사망하였을때 아렌스키는 그의 슬픔을 표현하는, 슬픈 현악 사중주 가단조 작품 35번을 작곡하여 차이코프스키에게 헌정하였다. 이 가단조 사중주는 바이올린, 비올라, 두대의 첼로로 연주되는 특이한 구정을 가지고 있는데, 나중에 통상적인 사중주 버전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으로 편곡되었다. 이 사중주의 2악장은 차이코프스키의 "아이들의 노래" 작품 54, 1번, "전설: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어린아이었다네" 에 기초한 변주곡으로 구정되어 있다. 이 변주곡들은 아렌스키는 자신이 스스로 이 작품을 통상의 현악사중주와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별도의 작품으로 출판하여, 즉각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아렌스키 변주곡"은, 오늘밤 연주되는 것처럼, 이 작곡가의 다른 작품들이 현재 상당부분 잊혀졌지만 여전히 가장 오래도록 인기있는 오케스트라 작품 콘서트 레퍼토리가 되었다.


The theme, the melody of the Tchaikovsky song, is presented simply. Six variations follow, expressing in turn: lyricism, wistfulness, melancholy, and dramatically explosive energy, all with the dark underpinnings that are so characteristic of Tchaikovsky's music. The seventh and last variation strikes one as having been borrowed from Tchaikovsky's famous Andante Cantabile. The work closes in a muted coda in which the poignant theme is heard again before giving way to a wailing chant that ends abruptly with simple pizzicato chords.


주제-차이코프스키의 선율-는 간단하게 제시된다. 6개의 변주가 뒤이어 나와 감정을 표현한다: 서정, 동경, 우울, 그리고 드라마틱하게 폭발하는 에너지. 모두 차이코프스키 음악의 성격인 어두운 분위기이다. 7번째와 마지막 변주는 차이코프스키의 유명한 안단테 칸타빌레에서 빌려온 느낌이 든다. 이 작품은 사무치는 주제를 다시 들려주고 훌륭한 노래가 단순한 피치카토 코드로 갑자기 끝나는, 약음된 종결부로 끝난다.


출처: http://cmd.ophth.uiowa.edu/hancher/stmartin.html




The Russian composer, conductor and pianist Arensky was a pupil of Rimsky-Korsakov at St. Petersburg Conservatory and later taught at the Moscow Conservatory, where his pupils included Rachmaninov and Scriabin. His compositions often reflect the influence of other composers, more particularly that of Tchaikovsky. He was musical director of the Imperial Chapel in St. Petersburg from 1895 until 1901 and thereafter continued his career as composer, pianist and conductor, travelling widely in the last two capacities. He died in 1906.


러시아 작곡가, 지휘자, 피아니스트인 아렌스키는 성페테르스부르크 컨서바토리에서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학생이었고 나중에 모스크바 컨서바토리에서 라흐마니노프와 스크리아빈 등을 가르쳤다. 그의 작곡들은 종종 다른 작곡가의 영향을 받았는데, 차이코프스키의 영향이 가장 특별하다. 그는 1895년부터 1901년까지 성페테르스부르크 제국성당의 음악감독이었고, 그후 작곡가, 피아니스트, 지휘자로서 경력을 지속했고, 지휘자, 피아니스트로 연주여행을 다녔었다. 그는 1906년에 사망했다.


<고클에 등록되어 있는 음반>

ARENSKY: Variations on a theme of P.I.Tchaikovsky in E minor op.35 등록된 음반: 6종

 아렌스키: P.I.차이코프스키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 마 단조 작품 35   (전곡녹음 - 녹음연 도순)
 1987   Evgeny Svetlanov
 1989/05   Mark Ermler
 1990   Saulius Sondeckis
 1996/05   Hyo Kang
 2001/12   Valery Polyansky
 ⓟ1965   sir John Barbirolli

Posted by 슈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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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초보자들이 활 힘조절을 못해서 덜덜 떨면서 활긋기를 하는 것을... 활비브라토라고 부르는 것이.... 바친기 공식용어로 굳어진 듯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정말 "활비브라토"라는 것이 있습니다..^^


Matthew Loucks라는 분의 올 11월 헨델의 메시아 공연 프로그램노트에서 다음 내용을 발췌했습니당..

http://www.earlymusiccolorado.org/emc_article.html


Several Baroque bowing techniques have also been incorporated into tonight’s performance which on the outset might appear unorthodox or awkward to many performers (and listeners) but nevertheless are essential to the process of recreating a more “authentic” Baroque sound.   

 

One example is the technique referred to as “bow-vibrato” which is described in both Leopold Mozart’s and Quantz’s Treatises.  Bow-vibrato was performed by drawing the bow across the string(s) while gently applying pressure with the index finger at varying rhythmic intervals creating a distinct “pulsating” or “tremelo” effect.  Many string players today mistakenly interpret “bow-vibrato” as “portato” which is entirely different but is notated in a similar fashion.  Händel calls for “bow-vibrato” in movement #2 (Comfort Ye…) as well as movement #36 (I know that my Redeemer liveth ..).


이야기인즉슨... 메시아 두군데에 헨델이 활비브라토를 하라는 지시를 해놓았다는 것인데요... 이 활비브라토는 예전 바로크시대 활테크닉 중의 하나로... 활을 현에 그으면서, 여러가지 리듬간격으로 검지로 활을 눌러주면 진동하거나, 트레몰로 같은 효과를 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요즘 연주자들은 활비브라토를 포르타토와 같은 것으로 해석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활비브라토라는 것이..... 초보자들의 경우처럼 무의식중에 덜덜 떨리는 것은 아니지만, 검지로 의식적으로 활을 눌러 결국... 음을 떨리게 하는 효과를 내는 것이니... 어쨌든, 활로 떨리는 소리를 내는 것은 맞기는 맞습니다..ㅡㅡ;;




그리고 하나 더.. 개방현에서 비브라토를 하는 법!

물론 위에서 말씀드린 활 비브라토 (초보용이건 바로크용이건 간에..^^) 하시면 되겠지만, 정석 (과연 정석인지는... 미확인..)은 이렇다는 군요.


http://www.violintips.com/info/vibrato.html

Believe it or not, there is a way to get a vibrato 'effect' on an open (unstopped) string. This is usually only used for the open G string, because it is the only note on the violin that there is no alternate 'fingering' for. (That would be the open C string on viola).

The way you do this is to stop the note one octave above the open string with your finger, on the next highest string (ex. G, 3rd finger on the D string), and apply vibrato to that note, while playing only the open string below. This creates a shimmering vibrato sound for the open string.

This happens because the vibration of the open string creates a sympathetic vibration in the string next to it (especially when it is one octave higher). And because you are applying vibrato to that higher octave, it passes the effect back to the open string in a similar way, through sympathetic vibrations. It also affects the overtones of the open string.


http://www.philharmonia.co.uk/thesoundexchange/the_orchestra/strings/cello/vibrato/ (첼로에 관한 내용이지만, 유사한 내용이 맨 끝에 있지요)


즉.... 바이올린의 경우, 가장 낮은 G음을 개방현으로 연주하는 경우에.. 보통의 경우처럼 비브라토를 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이용되는 것인데....  한 옥타브 위의 G음 (즉, D선의 1포지션 솔)을 누르고, 낮은 G선을 개방현으로 연주하면서 한 옥타브 위의 G음을 비브라토를 해주면, 공명현상을 통해서, 비브라토와 유사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자세한 내용이 뭐가 되든지.... 활비브라토라는 고난이도 테크닉을 구사하는 초보 여러분들 (저를 포함해서^^) 화이팅입니다^^;;

Posted by 슈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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