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로 위에 추가를 하자!

세상의 모든 아침은 픽션이기는 하나 실존 음악가들을 소재로 하였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마랭 마레의 그림을 하나 퍼왔습니다^^;;


1656 파리 출생, 1728 파리 사망. 륄리와 생콜롱브의 제자. 베르사이유의 궁정음악가. 비올연주자이자 작곡가. 그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는 없지만, 마랭 마레는 파리 사람인 까트린 다미쿠르와 결혼 19명의 자녀를 두었다네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http://www.pierre-marteau.com/

(제라르 드파르디외보다 잘생겼네요^^ 아들 기욤 드파르디외는 괜찮던데...)



Monsieur de Sainte-Colombe

쌩 콜롱브는 1640년 경에 태어나서 1690년 경에 사망했고, 유명한 비올연주자였답니다. 아버지인 Jean de Sainte-Colombe도 역시 유명한 연주자였구요. 그에 대한 것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베이스 비올에 7번째 현 (AA) 을 달은 사람으로 추정된다는 군요...

마렝 마레를 포함한 이후 음악가들은 그가 "완벽한" 비올기법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고 하네요.


쌩 콜롱브는 그의 두 딸을 직접 가르쳤고, 집에서 연주회를 열곤 했을 거라네요 .... 영화에서 처럼요.


그의 곡 Les Pleurs의 악보를 첨부해 봅니다.. 두대의 비올을 위한 곡인가봐요.

Posted by 슈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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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에서.. 아델라이데 협주곡의 진위도 역시 의심스럽게 여겨지고 있다고 하네요..


http://www.mozartforum.com/Lore/article.php?id=040&pt_sid=71f5cde08ba54f47d8f623fed00769ba


KV.Anh294a Adelaide Violin Concerto


Dennis Pajot

(이사람..위 주소의 모차르트포럼 사이트 운영자군요...^^)


아델라이데 협주곡은 1933년 Marius Casadesus에 의해 편집, 출판되어졌다. Jelly d'Aranyi가 런던에서 초연했다. (이 부분은... 좀 이상하군요. 메뉴인 연주가 1932년 녹음이라고 되어 있던뎅.....ㅡㅡ;;; 뭐가 맞는 건지 몰겠네요...) Casadesus에 의해 아델라이데로 명명되었는데, 그가 작업한 짧은 악보는 두 개의 보표 위에 서명이 있었고 - 위의 것은 독주부분 (D)에, 아래것은 베이스 (E)에 - 루이15세의 큰딸인 Adelaide de France부인에게 헌정되어졌다고 쓰여 있었으며 1766년 5월 26일, 베르사이유라고 되어 있었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 소위 서명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의심스러웠는데, 이것이 프랑스의 개인 소장품이라고 주장되어졌지만, 그 당시의 전문가들 (당시 뛰어난 모차르트 전문가인 Georges St.Foix를 포함하여)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것이었다. 또 다른 뛰어난 전문가인 알프레드 아인슈타인 (알버트 아인슈타인과 친척이긴 하나 다른 사람입니다^^;; 유명한 음악학자죠)는 그 서명을 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 출판사인 Schott도 서명을 봤다라고 얘기하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은 1934년 처음으로 이 작품의 근원을 분석했다. 그는 왜 이 협주곡이 레오폴드 모차르트가 1768년 작성한 그의 아들의 작품목록에 빠져있는지를 의문시했다. 아인슈타인은 또한 모차르트 일가가 1766년5월28일에 베르사이유에 도착하였고 (작품이 헌정되었다고 주장되는 날보다 2일 뒤이다) 6월1일에 파리로 돌아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왜 모차르트가 미완성된 작품을 헌정했는지도 질문했다. 그는 만약 볼프강이 "협주곡을 쓰길 원했다면, 그는 협주곡으로 썼을 것이지, 두 오선지로 쓰지 않았을 것이고, 모차르트는 총보를 다루는 일에 아주 익숙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그 작품의 스타일이 모차르트 후기 작품으로 부터 나온 것 같다고 믿었다. 이러한 모든 증거들로 인하여 아인슈타인은 이 작품이 모차르트의 작품이라는 점을 의심했다. 그러나, 혹시 네델란드에서 스케치된 "변주곡"의 잃어버린 부분이며 나중에 파리로 간 것일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함으로서 약간의 가능성은 남겨놓았다.


10년후,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모차르트 책에서, 이 협주곡은 Casadesus의 크라이슬러 식의 신비화된 곡이라고 부드럽게 서술했다. (크라이슬러가 본인의 곡인데도 마치 예전 작곡가의 곡인 것처럼 하곤 했다는 군요. 그래서 Casadesus도 본인의 곡을 모차르트의 곡인 것 처럼 신비화 시켰을 수도 있다는 뜻인 것 같네요. -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고클에 물어봤더니 어느 분이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Friedrich Blume은 1956년에 이 헌정에 관한 문제의 해결점에 도달했다. 원고와 헌정사는 서로 전혀 관계가 없으면 우연히 같이 있게 된 것이라는 것; 그리고는 놀라운 이야기를 했는데 "그 근원을 알 수 없다면 그 작품과 서명 모두를 부인하는 것 보다는 가설을 세우는 것이 훨씬 낫다"라는 것.. 그리하여, Blume은, 1764년의 바이올린 소나타 작품 1과 2에 있는 것과 비슷한 그 헌정사가.. 볼프강의 알려지지 않고 실종되었던 또 다른 작품에 대한 헌정사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도록 했다. 그는 이 작품에 대한 질문들에 대답을 하는 것보다는 "그 질문은 이제 별로 흥미 있는 것이 아니다"라도 말했다. !!!! Blume은 아델라이데 협주곡이 K207,  K211과 구조적으로 비슷하다고 보았고, 이 두 곡이 아델라이데를 능가하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그는1775년 4월과 7월 사이에 스케치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 없다"고 믿었다.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세계에서 이 곡을 밀고 있는 단 한 사람은 에후디 메뉴힌이었다. 그는 이 곡을 7번 협주곡과 같이 녹음했다. K6 (나중에 6번째로 다시 매겨진 쾨헬 번호)체계에서는 이 곡을 Anh C (Anhang, 쾨헬 목록의  appendix인데, 의심스럽운 작품들을 그 쪽으로 넣더군요) 섹션에 넣고 있으며, New Grove (음악백과사전)는 이 곡을 단순히 위작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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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역시.... 제가 번역하니 뭔말인지 종잡을 수가 없네요...ㅜㅜ

Posted by 슈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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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Auguste de Bériot

베리오는 19세기 벨기에의 바이올리니스트입니다. (1802. 2.20 - 1870. 4. 8)

뢰벤에서 태어났고, 비오티Viotti의 제자였던 쟝 프랑스와 티비Tiby와 같이 바이올린을 공부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비오티와 바이오Baillot와 함께 일했고, 또 파가니니의 영향도 받았다고 합니다. 베리오는 프랑스의 샤를 10세, 네덜란드 윌리엄왕의 궁정 바이올리니스트로도 일했구요. 유럽각지로 연주여행도 많이 다녔었답니다.

베리오는 9세에 비오티 협주곡을 대중들 앞에서 연주했었구요. 그의 부모가 1812년에 작고한 이후에는 선생인 쟝 프랑스와 티비의 후견하에 자랐습니다. 1824년 경에는 비르투오조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826년에 앞서 말한 것처럼 궁정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구요.

베리오는 오페라 가수인 소프라노 마리아 말리브란과 1829년 부터 같이 살았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멘델스존은 이 커플을 위해서 솔로 바이올린 반주의 아리아도 작곡해 주었다는 군요. 1836년 아내가 말에서 낙상하여 죽었구요 (임신했었답니다...). 베리오는 4년후에 독일로 가서 마리 후버와 재혼을 했답니다.

1842년에 바이오가 죽은 후, 바이오의 자리였던 파리음악원의 교수 자리가 베리오에게 주어지게 되었지만, 베리오가 거절했구요. 1843년에는 브뤼셀음악원의 바이올린 주임교수가 되었습니다. 교수가 된 후에는 연주는 줄이고, 실내악연주를 즐겼구요.

브뤼셀에서 베리오는 프랑코-벨기에 바이올린 학파를 창립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1852년 시력을 잃게 되어 은퇴하였구요. 1858년에는 완전히 실명을 하였습니다. 1866년에는 왼쪽팔의 마비가 와서 그의 바이올린 경력은 끝나게 되었구요. 그의 제자로는... 후버트 레오나르, 앙리 비외탕, 하인리히 빌헬름 언스트, Milanollo 자매가 있습니다.

그는 사실상 벨기에 바이올리니스트들의 대부였는데요... 위에서 언급한 분들 이외에도 Ysaÿe, Massart, Marsick, Prume, César Thomson 같은 사람들이 베리오 이후 벨기에 학파의 연주자들입니다.

베리오는 10개의 협주곡을 포함해서 바이올린 음악들은 꽤 많이 작곡했습니다. 최근에는 거의 연주되지 않기는 하지만, 그의 교육적인 목적의 작곡들은 여전히 바이올린을 배우는 학생들이 많이 공부합니다. 그의 아들인 샤를-윌프리드는 그라나도스, 라벨을 가르친 피아니스트였습니다. 베리오는 68세의 나이로 1870년 뢰벤에서 죽었습니다.

Violin Concerto No. 9 in a minor, Op. 104

베리오의 바이올린 협주곡 9번은 1858년에 작곡되어졌다고 하고, 타트야나 유수포프 공주 Princess Tatyana Yusupov에게 바쳐졌다고 합니다. 이는, 단순한 우정의 표시일뿐만 아니라 1859년 9월에 성 페테르스부르크에서 7개월을 보낼 수 있도록 초대하여 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고 합니다. 6번과 7번 협주곡과 마찬가지로, 9번은 악장간에 쉬지 않고 3악장을 연달아 연주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베리오가 바이올린곡을 쓰는 법을 보여주고, 오페라적인 우아함과 그의 연주를 특징짓는 스타일의 유려함을 보여줍니다.

협주곡 9번의 녹음은 Takako Nishizaki의 연주로 Naxos에 있구요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Zhakar Bron이 이 협주곡을 학생들에게 가르쳐 주는 DVD도 있다고 합니다만 역시,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그밖에 Ella Susmanek 연주로 이 곡이 아이들을 위한 바이올린 곡집에 실려 있는 것도 봤습니다.


위의 정보는 위키피디아 및 낙소스의 해설에서 얻은 것입니다....

http://en.wikipedia.org/wiki/Charles-Auguste_de_Beriot
http://www.naxos.com/mainsite/blurbs_reviews.asp?item_code=8.555104&catNum=555104&filetype=About%20this%20Recording
&language=English

http://www.arkivmusic.com/classical/album.jsp?album_id=12581

Posted by 슈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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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가 너무 작아서 워드에 붙여놓고 읽다보니 번역이 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하다보니, 역시 번역은 내 적성이 아니다... 어쨌건.. 대충^^;; 베흐스버그가 어디다 쓴 글을 이 웹사이트가 가져온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하이페츠의 어느 CD안의 설명서인지 Note인지가 아닐까 싶다. 이 사람.... 상당한 하이페츠의 팬이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중간 (회색글자) 은 번역이 귀찮아 이덕희씨책이 이 글을 인용하고 있는 부분을 다시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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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 can be no doubt today that Jascha Heifetz is the greatest violinist of our generation. When all is listened to and said and done, Heifetz' supremacy as fiddler and musician emerges as one of the few unchallenged facts of our clouded musical age.

 

오늘날 야샤 하이페츠가 우리세대에서 가장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라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모든 것들을 들어보고 이야기 해보았을 , 하이페츠의 바이올리니스로서, 음악가로서의 최고 우위는 우리의 구름낀 음악의 시대에 도전받지 않을 진실이다.

 

I've been an ardent Heifetz fan since I first heard him one night in the 'twenties in Vienna's Konzerthaussaal when he performed the Mendelssohn Concerto. Like other Heifetz fans I've taken a proprietary interest in him and am secretly as pleased with his artistic durability as smart investors are with their IBM shares which they bought at 100 and watched go up and up all these years. Heifetz has always been a gold-plated investment for the listener; no matter what happened to others, he would pay off his regu­lar dividends.

 

나는 하이페츠가 ‘twenties in Vienna’s Konzerthaussaal’에서 멘델스존 협주곡을 공연했을 , 처음 그의 연주를 들은 이후로 그의 열광적인 팬이었다. 다른 하이페츠의 팬과 마찬가지로, 나는 우선적인 관심을 그에게 두었고, 그의 예술적인 내구력에 남몰래 즐거워 했는데, 이는 현명한 투자자들이 100 IBM주식을 사서 주가가 상승하는 것을 년간 보는 것과 비슷하다. 하이페츠는 언제나, 청중들에게는 금딱지가 붙는 투자였다. 다른사람들이 어떻게 되던, 하이페츠는 정규배당을 지급하곤 했다.

 

It has become a popular indoor sport in our concert halls to judge a performer not by the tens of thousands of right notes he plays in one concert but by the four or five false ones. It is almost impossible to hear Heifetz play five false notes in one evening, and some listeners amuse them­selves watching out for passages of "cold tonal beauty" or matching him against other prominent fiddlers—as if art­ists were ballplayers. These indoor sportsmen have to admit that Heifetz' batting average has been consistently high. And although the myth of his "brilliant coldness" persists in certain circles, he can still make it as hot for other fiddlers as some thirty years ago in Carnegie Hall when Leopold Godowsky made his famous crack that it wasn't hot in there during a Heifetz recital—not for pianists.

 

연주가를 그가 연주하는 수만의 '맞는' 음표들에 의하여가 아니라 4-5개의 '틀리는' 음표에의 하여 평가하는 것이 콘서트홀에서의 인기있는 실내스포츠가 되어간다. 하이페츠가 하루 저녁에 5개의 틀린 음을 연주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몇몇 청중들은 차가운 음색의 아름다움 가진 패시지를 지켜보거나, 하이페츠를 다른 유망한 바이올리니스트 들과 견주는 것을 즐긴다 마치 예술가들이 야구선수들인 처럼. 이들 실내 스포츠맨들은 하이페츠의 타율 평균이 지속적으로 높다는 인정하여야 것이다. 그리고 몇몇 그룹들에서 주장되는 그의 빛나는 차가움 신화에도 불구하고, 30년전에 고도프스키가 카네기홀에서 (하이페츠의 카네기홀 리사이틀만큼 뜨거운 공을 아니지만) 유명한 타격을 가했을때처럼, 하이페츠는 여전히 다른 바이올리니스트에게 뜨거운 공을 있다.

 

An artist is the image of his times. Paganini's contem­poraries loved his stupendous technique, Kreisler's his warm, glowing tone. Today we take for granted Heifetz' technical prowess and disciplined emotion (which to some people may sound like "cold tonal beauty") before we even discuss his spiritual interpretation of a work. I am assured that G. B. Shaw really told young Heifetz "to make a habit of playing one wrong note every night before going to bed." Shaw knew that perfection per se was a dangerous thing because it implied mechanized, soulless virtuosity.

 

예술가는 시대의 초상이다. 파가니니의 동시대인들은 그의 불가사의한 기교를 사랑했고, 크라이슬러의 따뜻하고 빛나는 음색을 사랑했다. 오늘날 우리는 그의 작품에 대한 정신적인 해석을 논의하기에 앞서서, 하이페츠의 기교적인 솜씨와 훈련된 감정 (어떤 사람들에게는 차가운 음색의 아름다움으로 들리는) 당연하게 여긴다. 버나드 쇼 어린 하이페츠에게 잠자리에 들기전 틀린 음을 한음 연주하고 자는 습관으로 삼으라고 말했다고 한다. 쇼는 완벽 자체가 기계적으로 있으며, 영혼이 없는 기교가 있기에, 위험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I remember one afternoon in Beverly Hills when I asked Heifetz, after a long talk, how he'd played an extremely difficult passage in a concerto that had puzzled me as well as a lot of fellow fiddlers. Heifetz nonchalantly picked up his Guarneri and performed the atrocious passage for me so quickly and easily that I was unable to see how he'd done it. I asked him whether he would do it once more. He obliged—and again I hadn't the faintest idea how he'd done it. Seeing the blank look in my eyes, he shook his head sadly at such ignorance. To this day I don't know how he'd played that passage; and I bet there are a lot of able fiddlers who wouldn't know it either if they saw it. It must be very lonely up there where Heifetz performs.

 

나는 비벌리힐즈의 어느 오후를 기억하는데, 그와 오랜 이야기 끝에 나는 어느 협주곡에서 나를 포함해서 다른 많은 바이올린 주자들을 당혹시켰던 극도로 까다로운 패시지를 그가 어떻게 연주했는가를 물었다. 하이페츠는 태연하게 과르네리 (페르디난트 다비드) 집어선, 나를 위해 지독한 패시지를 아주 빠르고 쉽게 연주해 주었는데, 도대체 그가 어떻게 연주했는가를 나는 도무지 수가 없었다나는 한번 연주해 있느냐고 물었고 그는 다시 한번 호의를 베풀었다 - 하지만 나는 그가 어떻게 그걸 연주했는가에 대해 손톱만큼도 없었다. 나의 눈에 나타난 멍청한 표정을 보고 그는 이와 같은 무지에 대해 슬프게 고개를 저었다. 이날까지도 나는 지독한 패시지를 그가 어떻게 연주했는가를 알지 못한다. 또한 맹세코 나는 숱한 바이올린 주자들도 설사 그들이 하이페츠의 연주를 가까이서 본다해도 나처럼 결코 그걸 없을 것이라고 단언할 있다. 이페츠가 연주하는 높은 곳은 매우 외로운 곳임에 틀림없다..

 

It isn't difficult to analyze Heifetz' greatness as a violin­ist but very difficult to get to the core of his art. Heifetz always sounds like himself, on his 1714 Stradivari, made in Cremona, or on a ten-dollar factory "Strad," made in Czechoslovakia. He is a great violinist because of his beau­tiful tone—which has a timbre all of its own—and the depth of his emotion, the incisiveness of his bowing, his impec­cable taste and sound instinct. (Asked by young Heifetz how he should play a certain passage, his great teacher, Leopold Auer, once said, "Play it with your nose; you'll make it sound all right.") Heifetz makes even the fasci­nating hillbilly passage in the Gruenberg Concerto sound wrong, as it should. No one has ever heard him play a false portamento.

 

하이페츠의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위대성을 분석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의 예술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이페츠는 크레모나에서 만들어진 1714 스트라디바리로 연주하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만들어진 10불짜리 공장제 스트라드 연주하던 항상 자신의 소리를 냈다. 그는 그의 아름다운 음색 모두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그의 감정의 깊이, 보잉의 날카로움, 흠잡을데 없는 취향 그리고, 소리에 대한 감각 등으로 인하여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인 것이다. (하이페츠의 스승인 레오폴드 아우어는 어느날 하이페츠가 어떤 패시지를 어떻게 연주하는 가를 물었을 , “코로 연주해라, 바른 소리가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이페츠는 그래야 했기 때문에 그루넨버그 협주곡에서의 환상적인 컨트리 뮤직 패시지를 심지어 잘못 소리내기도 했다.  누구도 그가 잘못된 포르타멘토 (슬라이딩 주법)를 연주하는 들은 적이 없다.

 

But there's a lot more to Heifetz, the artist. When he performed for the first time Prokofieff's G Minor Concerto No. 2, on December 17, 1937, with the Boston Symphony under Serge Koussevitzky, many listeners are said to have cried during the beautifully lyrical second movement. There are not many performers these days who would bring tears to my eyes, but Heifetz in his moments of lyrical expression is one of them. No artist can do that unless he's found the meaning of the music, the meaning behind the notes.

 

그러나 하이페츠에겐 많은 것이 있다. 예술가로서. 그가 1937 1217일에 Serge Koussevitzky 지휘하는 보스톤 심포니와 프로코피에프의 g단조 협주곡 2번을 처음으로 연주했을 , 많은 청중들은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2악장이 연주되는 동안 울었다고 했었다. 근래에는 눈에 눈물을 흐르게할 연주가는 많지 않다. 그러나 하이페츠는 서정적인 표현의 순간에는 바로 그런 연주가들 하나이다. 어떤 예술가도 음악의 의미, 음표 뒤의 의미를 깨닫지 않는 그렇게 없다.

 

The Prokofieff Concerto No. 2, which Heifetz recorded once before (with the Boston Symphony under Koussevit­zky), seems custom-made for him, with its lyrical sweep and incisive rhythms. This is the music of the new Russia —thumping steel hammers and blasting engine whistles instead of Ej Uchnjem Weltschmerz and Kremlin bells. The concerto is immensely alive, full of emotion—disciplined emotion, to be sure—and stimulating rhythm. The com­poser's brilliance for once is matched by the interpreter's brilliance. Watch out for the soaring sound of the solo violin in the first part and the devilishly difficult passages in 7/4 and 5/4 time in the finale. Or better, don't watch for anything. Turn off the light, close your eyes and enjoy yourself.

 

하이페츠가 녹음한 프로코피에프 협주곡 2번은 서정적인 흐름과 예리한 박자로 인하여 마치 하이페츠를 위하여 작곡된 음악처럼 보인다. 이는 Ej Uchnjem Weltschmerz (서글픈 러시아 노동요로 추정) 크렘린의 대신에 쇠망치를 두드리며, 엔진 휘슬을 울리 새로운 러시아의 음악이다. 협주곡은 거대하게 살아있으며 감정과 확실히, 훈련된 감정이다 자극적인 리듬으로 충만하다. 작곡가의 뛰어남은 해석자의 뛰어남과 어우러진다. 첫부분의 솟아오르는 바이올린 독주와 피날레 부분의 7/4, 5/4 박자의 악마적으로 어려운 패시지를 주시해 보라. 또는, 나은 방법으로, 아무것도 주시하지 말라. 불을 끄고, 눈을 감고 그리고 즐겨라.

 

Strangely enough, Heifetz has recorded the Mendels­sohn Concerto only once before, in 1949, with Sir Thomas Beecham; I would have sworn he'd done it at least three times. (In September 1920 he recorded the last movement as a solo piece, accompanied by Samuel Chotzinoff on the piano, but you will have trouble finding the recording which is a collector's item.) The Mendelssohn Concerto takes a special place in Heifetz' vast repertoire; he has played it on many important occasions of his career. Prob­ably the first was the evening in 1908, when little Jascha, aged seven, performed the concerto on a half-sized violin in Kowno, then in Czarist Russia, before an excited crowd of a thousand listeners. According to his biographers they were quite bewitched "by the smooth round tone he pro­duced and the masterly way in which his little fingers overcame the difficulties of the last movement. . ."

That was, mind you, fifty-one years ago.

 

이상하게도, 하이페츠는 멘델스존 협주곡을 한번만 토마스 비첨경과 같이 1949년에 녹음했다. 나는 그가 적어도 3번이상 연주를 했다고 맹세할 있다. (1920 9 그는 마지막 악장을 독주곡으로 새뮤얼 샤토지노프의 피아노반주와 같이 녹음했다. 그러나 음반은 구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멘델스존 협주곡은 하이페츠의 장대한 레퍼토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그의 경력에서 많은 중요한 순간들에 곡을 연주했다. 아마도 첫번째는 1908 저녁이었을 것인데, 그때 7살짜리 어린 야샤는 러시아의 코브노에서 흥분한 수천의 청중들 앞에서 1/2사이즈 바이올린으로 협주곡을 연주했다. 그의 전기에 따르면, 그들은 그가 만들어 내는 부드러운 둥근 소리와 그의 작은 손가락이 고난도의 마지막 악장을 극복하는 숙련된 방식에  황홀해 했다고 한다.

그것이 51년전의 일이 었다.

 

—joseph wechsberg Vienna, January 1959

Posted by 슈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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