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님의 칠순이 얼마 전이었다. 어떤 때는 세상에 온통 자기 욕심만 채우려하고, 자기의 티끌만한 이익 때문에 온갖 억지를 다 부리는 사람들이 가득 가득 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렇게 가끔씩 시골에 내려와 시부모님과 시골에 계신 친척 분들을 보면 이렇게 그냥 한 없이 맑게 살아가시는 분들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문경의 한 식당에서 조촐하게 가까운 친척들과 가족들이 모여 저녁을 먹고 노래방에서 당신에게 딱 어울리는 노래인 "흙에 살리라"를 열창하시던 시아버님은 집에 돌아와 식구들을 불러 모으셨다.
며느리들에게 시골에 시집와서 고맙다는 말씀을 하시며 훈훈하게 대화를 시작하셨는데 (이 때 우리 딸은 다음 순서로 아들들에게도 잘 커줘서 고맙고 칠순잔치도 고맙다는 이야기를 기대 중이었으나...) 갑자기 얼마 전 가훈을 정하셨다면서 전혀 예상치 못하게 영어로.... 'Rome was not built in a day'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Rome이라고 안하시고 '로마'라고 하셨음;)
뭔가 훈훈하지만 진지한 분위기 였는데 급 식구들의 얼굴에 당황의 기색이 번졌다. 할아버지께서 새로운 유머코드를 찾아 내신 건가 아니면 그냥 계속 진지한 분위기여야 하는가... 를 고민하는 와중에, 큰아주버님께서, "좋은 말씀이신데... 그런데 가훈을 영어로 정하는 건 좀... 솔선수범이라던가 좋은 말도 많은데... "라고 하시자, 이 분위기를 개그코드로 이해한 우리 딸내미는 "롬비일조"가 어떠냐며;;;; 그러니까 한자어로 '롬非一朝' -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로 하면 된다나;;
그러나 술도 좀 취하시고 기분도 좋아지신 아버님께서는 영어로 해야 한다시며, 얼마나 좋은 말이냐고 하시면서 이제부터 가훈은 '로마 워즈 낫 빌트 인어데이'라고 강조하셨다. 이제부터 아이들이 학교에서 가훈을 써오라고 하면 그렇게 써가야...;;
문경새재 넘어 산을 넘고 넘어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시며 사시던 아버님과 지나치게(?) 글로벌한 가훈이 영 어울리지 않는다 싶다가도, 어쩐지 이거야 말로 욕심없이 부지런하게 평생을 사신 두 분과 그야말로 잘 어울리는 멋진 가훈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 분들이 평생을 흙과 더불어 사시면서 느낀 것들을 자식들에게 그렇게 가훈으로 전해 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우리 딸은 서울 올라와서도 정말 그날 저녁 할아버지가 진심으로 하신 말씀이냐고 또 묻는다. 자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할아버지의 유머였던 것 같다며. 유머여도 좋고 진심이어도 좋은 듯. 인생은 원래 즐겁게 그러나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